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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점프 업 - 뉴욕] '컴퓨터' 전공 아버지와 '의대' 졸업 딸이 만났다

플러싱 등 4곳 운영 '중앙장의사' 父 하봉호 - 女 하혜민

장례일에 행복한 아버지 보고 맥칼리스터대 입학 가업 잇기
불체자·흉악범 등 사연도 다양…사소한 것도 약속지켜 신용쌓아


뉴욕시 최대 한인 밀집지역인 퀸즈 플러싱 41애브뉴에 있는 ‘중앙장의사’는 한인 이민자들의 눈물과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자녀들을 성장시키고 쓸쓸하게 혼자 살다가 이국생활을 마감한 이민 1세대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생을 마감한 불법체류자, 흉악한 범죄의 희생자 등 중앙장의사를 거쳐 영면(永眠)에 들어간 한인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중앙장의사는 지난 90년 문을 열었는데, 당시로서는 미 동부지역 최초의 한인 장례식장이었다. 현재는 플러싱에 두 군데, 뉴저지 잉글우드, 리지필드 지점 등 4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중앙장의사는 지난 20년간 무연고·범죄 피해 한인들, 극빈층 한인들의 장례가 종종 치러진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중앙장의사 하봉호 대표(59)의 평소 지론에 따른 것이다.



◆컴퓨터 사이언스 전공자가 공인 장례사로= 하 대표가 장례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는 특별하다.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삼성전자 연구소에서 잠시 근무하다 82년 유학생으로 미국땅을 밟았다. 프랫대에서 컴퓨터사이언스 석사 과정을 마쳤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하 대표는 자신이 장례업계에 종사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하 대표는 유학생 시절 주말마다 성당을 다니며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하 대표가 따르던 미국인 수녀가 있었는데, 그는 공인 장례사기도 했다.

“수녀님을 따라 플러싱에 있는 여성 홈리스 셸터에 봉사를 나가곤 했습니다. 당시 셸터에는 한인 여성도 3명이 있었는데, 저는 노숙자들과 악수를 하면 곧 손을 씻곤 했어요. 그러나 수녀님은 이들을 가족처럼 따뜻하게 돌보며 직접 장례를 치러주는 등 진정한 봉사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저는 늘 사회에 무엇인가를 빚진 느낌이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무슨 사업을 할까 고민하다가 당시로서는 한인사회에 전무했던 장례업에 도전하기로 한 겁니다. 사업도 하고, 남도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 대표는 결국 맨해튼에 있는 장례학 대학인 ‘아메리칸 아카데미 맥칼리스터 인스티튜트 오브 퓨너럴 서비스’ 입학을 결정하고, 생소한 공부를 시작했다. 88년 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주 공인장례사 라이선스를 취득한 그는 2년간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마침내 90년 중앙장의사를 개업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레지던트로 일했던 미국계 포가티(Fogarty) 장례식장을 인수해 중앙장의사를 개업했다.

뉴욕 지역으로 한인 이민이 시작된 이후 80년대까지 한인 장례업체가 없었던 이유는 한인사회의 낮은 사망률로 인해 비즈니스로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뉴욕시 보건국 자료에 따르면 한인이 처음으로 별도 분류되기 시작한 지난 87년에는 뉴욕시에서 한인 97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2008년에는 사망자가 278명에 이르러 20년새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의대 졸업한 딸도 아버지 뒤이어= 하 대표에게는 최근 든든한 후원자이자 후계자가 생겼다. 딸 혜민(30)씨가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한 것. 혜민씨의 이력은 아버지만큼이나 독특하다. 그는 서울대 의예과(99학번) 예과 과정 6년을 마친 ‘예비 의사’였다. 그러나 이후 진로를 바꿔 뉴욕대(NYU)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가업을 잇기로 결정하면서 아버지가 공부한 맥칼리스터대에 입학해 지난 2007년 장례학과 과정을 마쳤다.

혜민씨는 “의대를 안 다녔다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도와주고 싶어도 ‘무서워서’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로서 의대를 다닌 게 결국 가업을 잇는데 도움이 됐다는 말이다. 우연치곤 재미있는 일이다.

“아버지는 항상 늦게 들어오셔도 집에 오시면 행복해 하셨고, 자기 일을 좋아하셨죠. ‘나도 크면 저렇게 살아야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어요. 또 어릴 때 식탁 옆에는 처참하게 굶주린 모습의 이디오피아 어린이 사진이 붙어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부러 붙여놓았던 사진인데, ‘밥 남기지 마라’고 얘기하곤 하셨어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라고 어릴 때부터 자식들에게 가르치셨죠.”

장례사라는 직업에 대한 아버지와 딸의 생각은 같았다. “유가족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이 되어줘야 한다. 고인의 모습을 편안하고 예쁘게 만들어 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혜민씨는 장례사 후배로써 아버지에 대해 “장례식장에 들어서면 구석의 조그만 전구가 끊어진 것도 금새 잡아내실 정도로 매사에 노련하다. 제가 고인을 아름답게 꾸며도 마무리는 늘 아버지께서 해주신다”며 스승이자 선배로서 배울 게 많다고 수줍어했다.

◆가슴 아픈 사연도 많이 접해= 하 대표는 20년 넘게 장례사로 일하다 보니 가슴 아픈 사연도 많이 접했다. 15년 전 한 할머니의 장례를 맡게 됐는데,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헤어진 아들이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들을 만나기 위해 북한 방문을 추진하다가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소식을 접한 하 대표와 유족들은 당시 한미 양국 정부와 정치인, 적십자사 등에 호소해 북에 있는 아들이 결국 미국을 방문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했다.

한번은 중년의 여성이 찾아왔다. 아이들을 낳은 후 집을 나갔던 남편이 병들어 죽을 때가 되니 집을 찾아왔다는 것. 그 동안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 아들은 교도소에, 딸은 중국계 갱 단원이 돼 있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하 대표는 교도소에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관계기관에 요청했고, 갱 단원이 된 딸도 수소문 끝에 찾아내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했다. 하 대표는 “아들은 양 손에 수갑을, 양 발에 족쇄를 찬 채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아들과 딸, 엄마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한 시간여 고인이 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하 대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유족들이 장례 상담을 하러 왔을 때 ‘수의는 무엇으로 할거냐’ ‘관은 어떤 것을 사용하겠냐’며 비즈니스에만 급급하면 안 된다”며 “대부분의 유족들은 장례 상담을 하러 왔다가 크고 작은 문제로 갈등을 빚는데, 먼저 가족들을 화해시키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딸 혜민씨도 장례사로 일하면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는 “한번은 장례가 끝난 뒤 한 자녀가 찾아와 아버지의 사망진단서를 요구하면서 ‘내가 가져갔다고 다른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라”면서 “부모가 돌아간 뒤 유산상속 등의 문제로 갈등을 빚는 자녀들을 볼 때 안타깝다”고 말했다.

◆장례의 본분은 ‘유족의 슬픔’ 달래는 것= 중앙장의사는 현재 협력업체만 40여 개에 이른다. 매년 500~600여 명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이는 미국 내 장례식장이 평균 100여 명을 처리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많은 숫자다. 타민족들의 장례가 빈번히 치러지기 때문이다. 현재 중앙장의사에는 중국계·히스패닉 장례사와 직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직원만 30명이 넘는다. 하 대표는 한인만을 상대로 한 장례업은 경제성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어에 능통한 아내의 도움을 받아 중국계 고객에게도 많은 신경을 썼다.

그는 “장례업은 보람과 자부심이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라며 “사소한 것이라도 유가족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며 신용을 쌓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형편이 어려운 유가족에게는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우선 적극적으로 도울 방법부터 찾는다. 장례사의 본분은 ‘유족의 슬픔을 달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지난 87년부터 가족의 묘소를 방문하고 싶어도 교통편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노인들을 위해 무료 성묘 서비스를 열고 있다. 하 대표는 “19년 전 외아들을 잃고 가슴에 묻은 한 노인이 장의사를 찾아와 성묘를 가고 싶은데 교통편이 없다며 울먹이는 모습을 봤다”며 “자식에 대한 애절한 사랑에 함께 목놓아 울었고 이후부터 무료 교통편을 제공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안준용 기자 jyah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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