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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기생충', 원시적 열정에 반대한다

스포일러를 지켜달라는 봉준호 감독의 호소는 과장이 아니다. 감춰진 설정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기생충(사진)'을 감상하는 데 절대적이다. 지금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해보려는 참이다. 알려진 것과 달리 '기생충'은 두 가족이 아니라, 명백하게도 세 가족에 관한 영화다. 반지하 가족의 장남 기우가 저택 가족의 장녀 다혜의 과외 교사로 채용되면서, 두 가족으로 대표되는 계급 구도가 본격화된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영화의 진심과 맞닿은 이른바 '가족 희비극'은 나머지 한 가족이 없었다면 애초에 구체화될 수 없었다. 이 가족은 철저히 가려져 있다가, 돌발적으로 솟아오르고는, 섬뜩하게 사라져버린다.

문광은 저택의 오랜 입주 가사도우미다. 그런데 반지하 가족의 전략에 밀려 그만 직장에서 쫓겨나고 만다. 예상컨대 봉준호 감독이 말하는 스포일러는 이 지점부터다. 며칠 후, 해고된 문광이 미처 못 챙긴 게 있다며 초인종을 누른다. 알고 보니 저택 지하실 아래에 비밀 벙커가 있었고, 바로 거기에 남편 근세가 박사장 가족이 이사 오기 전부터 숨어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영화의 제목에 부합하는 대상은 반지하 가족도 저택 가족도 아닌 바로 이 벙커 가족인지도 모른다.

이들이 일으키는 파장은 심대하다. 다양한 형태로 기이한 활력을 뿜으며 다른 가족들이 쌓아온 구도를 비틀거나, 굴절시키거나, 부러뜨린다. 이런 점에서 '기생충'은 단순히 반지하로 대표되는 빈곤층과 저택으로 표상되는 부유층 사이의 계급 갈등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제3의 것을 전면화하면서 영화는 대표성과 구도 자체에 균열을 가하며 그러한 양립에서조차 배제되는 비가시적 존재를 환기한다. 잉여, 이질, 타자 등으로 수식되는 존재의 사각지대를 장르를 비틀거나 서사를 흔들어 어떻게든 부여잡으려는 영화적 의지야말로 지금껏 봉준호 감독이 일궈낸 인장일 것이다.

문제는 유독 '기생충'에서만 도드라지는 카메라 시선의 폭력적 욕망이다. 벙커에서 기생하는 근세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그는 바나나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젖병을 물고 있거나, 다 쓴 콘돔을 이상한 방식으로 늘어놓는다. 이제는 사장된 언어인 모스 부호에 집착하거나, 비논리적 숭배자의 모습에 심취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는 광기 어린 살인마가 된다. 이처럼 제3의 영역과 관련된 '기생충'의 형상화는 예컨대 '마더'에서의 역광으로 포착된 기묘한 춤사위와 같은, 모호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들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것은 존재의 사각지대를 비이성의 야만이라 명명할 수밖에 없는 딱딱한 형상 안에 철저히 가둬버린다.



이것은 제3세계 지식인이 자국의 하위 주체를 필요 이상으로 원시화시켜 제1세계 사람들 앞에서 전시하는 욕망, 즉 원시적 열정이다. '저곳' 사람들은 '이곳'의 열정을 승인하며 여전히 굳건한 '서양=문명 vs 동양=야만'의 도식을 확인한다. '이곳'의 지식인은 '저곳'의 승인 덕분에 자국 내의 담론 지배권을 획득하거나 공고히 한다. 중요한 것은 소외되는 존재가, 바로 그 가난의 특수성이 굴절된 열정을 통과하며 자극적인 전시품으로 추락해버린다는 사실이다. 나는 '기생충'의 원시적 열정에 반대한다.


박우성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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