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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선

지난달 한국을 갔을 때이다. 북미에서 같이 간 동창 둘과 지방에서 일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해서 호텔로 가는 길에 지하철을 탔다. 각자 핸드캐리어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둘러보니 앉을 자리가 없었다. 친구와 기차와 기차 사이의 중간 유리문에 등을 대고 섰다. 구석진 자리라 가방을 세우기도 편하고 또 통로를 통과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무의식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사실 몸을 기대니 편하기도 했다.

조금 지나고 누군가 그 문을 열고 우리 칸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비켜서서 그 사람이 들어오게 해주고 다시 등을 대고 섰다. 그때였다. 연세가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왜 거기 사람이 다니는 곳을 막고 있느냐는 것이다. 꼭 저렇게 상식이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시며, 자신은 사람을 딱 보면 첫눈에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거다. 자신이 백 명의 사람을 면접했는데 의자에 앉기도 전에 결정하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만 원을 줘서 돌려보내신단다. 또 자신이 손주를 얼마나 경우 바르게 키웠는지를 이야기하며 열변을 토하신다.

야단 세례를 받는 와중에 자리가 생겨서 얼른 앉았다. 화도 내지 않고 친구들과 배시시 웃고만 있는 내게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미국에서 왔어요, 했더니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앞에 있는 친구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눈 밑의 지방 재배치 수술하고 가라고 하세요. 5번 전철역 몇 번 출구 무슨 성형외과가 잘해요. 얼굴의 눈 밑이 거슬리네. 기분 나빠할 테니까 내가 내리면 이야기하세요.

미국 생활에서는 대부분 타자가 내 삶에 훅하고 들어오는 경우가 없다. 남하고 나 사이에는 자동차로 움직여야 하는 거리쯤의 물리적인 공간이 있고, 또 정신적인 거리도 그 어디쯤인가 놔두고 사는 편이다. 타자에게서 나를 보호하고 타자는 또 나를 보호하고 하는, 외로운 구조가 선진국의 전반적인 시스템이다.



타자와 타자의 거리, 인간 군상의 사유의 추상성을 주제로 하는 영화가 최근 나에게 훅하고 들어 왔다. 제목 ‘기생충’이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고구마를 급하게 먹은 것처럼 답답한 결말이 불편했다. 자본주의 중력 장치를 벗어나려는 탐욕의 수직적 노력을, 수평적으로 관망하는 듯했다. 희망하고 마주칠 접점이 없는 비극적인 그들 이야기에 휘말린 느낌이었다.

영화가 상을 받던 날, 단지 한국인이란 이유로 난생처음 오스카 시상식을 실시간 다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훌륭한 결정을 믿고, 영화를 다시 봤다. 조금씩 은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선을 지키며 공생을 원하는 자와, 또 선을 넘어서서 공생하고자 하는 자들의 갈등이 보였다. 선은 사생활이고, 인격이고, 자존심이며, 넘쳐 오르는 강물이다. 또 창문 넘어들어오는 햇볕의 오지랖이다. 가끔은 바싹 마른행주기도 하다. 현대인들에게 선은 균형감을 잃으면 안 되는 우주의 생명체이다. 선을 이탈한 기차처럼 영화는 혼돈했지만, 감독은 변증법적 인간성 회복을 이야기했다고 본다. 선을 지혜롭게 넘고서, 서로 공존하고 이해할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꿈꾸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낯선 이의 방식에 쉽게 흥분하고, 타인의 아름다움까지 굳이 개입하던 오지랖 넘치던 지하철의 군중들 속에서, 시골 동네 우물가가 떠올랐다. ‘정’ 이란 이름 앞에 사랑과 상처의 이중의 칼날을 쓰며 선을 넘나드는 그 검도사들이 밉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내가 시골의 우물가가 매우 그리웠던 것은 아닐까.


이원경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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