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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11월을 맞으며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 -나태주 시인의 ‘11월’

세상을 통째로 흔들었던 뜻밖의 공포를 우리는 잘 버텨냈다. 그리고 이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환경을 최선을 다해 아직도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금방 달라붙을 것 같은 저승사자를 피하느라 큰 소리로 맘 놓고 웃어보지도 못하고 그 비좁은 시간을 조심조심 살아냈다. 이보다 장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세상에 살아내는 것 말고는 자랑할 것도, 잘난 척할 것도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 그런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11월을 이처럼 잘 표현한 시도 아마 드물 것이다. 이 시에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말과,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이라는 말이 서로 연관이 되는 듯하면서 다른 층으로 읽힌다. 전자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후자는 비록 그럴지언정 그 영역을 무효화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인생은 매 순간 자신이 가는 길이 혹시 잘못된 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옳은 길이라 여기며 현실적 자아와 이성적 자아 사이에서 불안해하기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한다.



아주 익을 대로 익은 달이 11월이다. 11월은 숭고한 목적을 무사히 끝낸 색채가 진한 달이다. 생명의 근원인 농사를 다 끝내고 푸성진 햇살과 함께 남은 12월도 흠 없이 살아야 한다. 흠집이 있으면 항상 꺼끌꺼끌 걸리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에 앞서 15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가 도나텔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작품이 나오면 망치로 마구 부숴버렸다고 한다. 완전한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부수고 또 부수고 하여 끝내는 그 유명한 기마상이나 다비드 같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삶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판단될 때 이처럼 땅땅 부숴버리고 새로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간이 남긴 오점은 두고두고 지울 길이 없다. 부숴버리고 싶은 과거일수록 오히려 거머리처럼 더 몸에 찰싹 달라붙어 영혼을 갉아먹는다. 멋진 과거는 우상처럼 자신을 지켜주지만 나쁜 과거는 뱀 문신처럼 몸에 박혀서 죽을 때까지 혀를 날름대며 몸과 마음을 뜯어먹는다.

그러기 때문에 돌아가기에 너무 먼 길을 와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인생길엔 돌아갈 처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여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다. 낯익은 것을 낯설게 만들어버린 이 뜬금없는 해체적 패러디 같은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밤이 길어지고 있다. 곁에 있는 사람을 더욱 사랑해야겠다.


정국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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