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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역사 간직한 서부개척의 상징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새크라멘토(Sacramento)

주마등처럼 지나간 나와 가족의 미국 이민생활도 몇 년 후면 30년이다. 나는 여성지 사진기자였고 아내는 간호사였다. 아내가 캘리포니아 간호사 면허를 취득하고 취업이민으로 새크라멘토에 있는 병원에서 일했다.

같은 시기에 나는 선배를 통해 한국에서 보낸 이력서가 통과돼 LA중앙일보에 경력기자로 입사할 수 있었다. 마침내 숙부가 오래 전 이민와 자리 잡고 사시는 LA에 도착했다. 아내는 이민국에 문의해 근무지 병원을 바꿔도 체류 신분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새크라멘토 병원을 포기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서부 개척시대는 시작되었다.

미국도착 한 달 후부터 2016년 퇴직할 때까지 중앙일보에서 이민생활 전 기간을 보냈고 아내는 벤투라 카운티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새크라멘토는 나의 이민생활이 시작될 뻔한 곳이었다. 지금도 가끔 처를 따라 새크라멘토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새크라멘토는 많은 사람에게 일확천금의 환상에 젖게 했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일어났던 곳이다. 마침 사진기자 후배가 이민 1세대로 성공해 새크라멘토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대학동창을 소개해줬다. 이분은 힘든 이민생활을 극복한, 척박한 미서부를 개척해 성공한 사업가였다. 인문학, 과학, 음악, 영화, 여행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실천적 탐구가기도 했다.

포르셰 자동차로 직접 레이싱을 하고 SUV 차량을 개조해 오지 여행을 하는 분이었다. 직접 막장에 들어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도 했다. 볼리비아의 열악한 탄광과 어린 노동자의 삶을 취재한 작품은 찡한 감동을 줬다.

새크라멘토에 도착해 신세를 지며 RV여행과 기술적인 문제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서부개척 시대의 새크라멘토를 안내해줬다. 새크라멘토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의 거리다. 하지만 기후는 차이가 크다. 매끄럽고 세련되고 아기자기한 샌프란시코와 거친 서부의 정취가 풍기는 새크라멘토처럼 날씨도 완전히 다르다.

여름이 대략 5월 말부터 시작되어 9월까지 계속되며, 여름에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햇볕만 쨍쨍 내리쬐는 날이 이어진다. 한여름인 7~8월에는 습도는 낮지만 최고 기온이 화씨 110도를 넘어가는 일도 다반사다. 샌프란시스코와의 낮 기온 차이가 화씨 30도를 넘어가기도 한다.

내가 방문한 6월 초의 날씨는 선선했지만 갑자기 변해 화씨 108도를 기록했다. 도저히 RV에서는 생활할 수 없는 기온이었고 다행히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북부에 있고 주도인 새크라멘토는 1839년 당시 멕시코 땅이었다.

1839년 존 서터라는 스위스 이민자가 물건을 거래하는 교역소를 세우면서 새크라멘토의 역사가 시작됐다. 새크라멘토는 조그만 서부 개척 마을이었다. 1848년 1월 24일 새크라멘토 인근 제재소 인부 제임스 마셜이 아메리칸 강에 떠다니는 사금을 발견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시작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오랜 세월 융기와 침식이 반복되었던 곳으로 금이 쉽게 발견되는 곳이었다. 개울이나 강둑에서 금을 발견하고 간단한 도구로 손쉽게 금을 채취할 수 있었다.

소문은 미 서부 해안 지역과 미국 동부, 유럽, 그리고 중국까지 급속히 퍼져나갔다. 말 그대로 신천지 캘리포니아에 일확천금을 꿈꾸는 각 부류의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1849년 한해에만 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 도착했다.

골드러시 때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포티나이너스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금 발견 이전 1만5000명이던 인구가 금 발견 3년 후 25만 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무법천지였다. 극소수만이 부를 누렸으며 대부분의 포티나이너스는 열악한 서부의 환경 탓에 광산사고, 질병, 사기, 매춘과 무법적 폭력 등으로 고통 받았다. 1848년에서 1858년까지 약 5억5000만 달러에 이르는 금을 채굴하였지만 그 영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부귀영화의 흔적은 새크라멘토 중심에 빛바래 남아 있다. 서부영화 세트장 같은 무더운 새크라멘토 올드타운을 서성거렸다. 꿈을 좇아 왔던 골든 스테이트에서의 이민생활이 별똥별의 파편이 되어 가슴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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