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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정치스타’ 왕안석의 친서민 개혁은 왜 실패했나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8/09/12 08:05

송나라 친서민대책 ‘희녕변법’
학계 명성 높은 왕안석이 주도
장밋빛 전망 불구 현실과 괴리
‘변법’ 혼란 후 60년 만에 망해


북송 시대 수도 개봉의 모습을 담은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의 일부. 북송은 강남 개발 등으로 경제가 발전했지만 과다한 재정지출과 평화를 담보로 거란과 서하에 바치는 세비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황제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해 개혁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중앙포토]

[유성운의 역사정치]
중국 송나라 신종 시대에 활약한 왕안석(王安石)은 중국 역사상 가장 논쟁적 인물입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량치차오·梁啓超)에서 “사직(社稷)의 죄인이자 백성의 적(사마광·司馬光)”까지 그를 둘러싼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갔습니다. 심지어 『신종실록(神宗實錄)』 『왕안석전』은 10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세 번 쓰여졌으며, 두 차례나 내용이 뒤집혔습니다.

왕안석에 대한 관심은 조선에서도 뜨거웠습니다.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혁파한 일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둘렀는가...왕안석은 고집이 너무 지나쳤지만 그 재주야 어찌 세상에 쓸 만한 것이 없었겠는가.”(정조)

“왕안석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야 어찌 사마광처럼 완전한 사람을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이지영)

“사마광과 왕안석은 서로 비교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정말로 편협한 것입니다...어찌 사마광의 재간이 왕안석보다 확실히 뛰어난 점이 있겠습니까.”(체제공)
(정조실록(正祖實錄) 32권, 15년 4월 30일)

대관절 왕안석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토록 주목을 받았을까요?


송나라 정계의 최고 스타, 왕안석


희녕변법을 주도했던 왕안석. 당송 8대가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중앙포토]

서기 1067년, 조욱(趙頊)이 송나라 6대 황제로 즉위합니다.

스무살의 청년 황제는 과거 오랑캐로 치부했던 거란이나 서하에게 평화를 담보로 많은 세비를 바쳐야 하는 현실에 분노했고, 날로 악화되는 국가 재정에 노심초사했습니다. 부국강병을 고민하던 그는 정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신진 왕안석을 ‘구원투수’로 기용하기로 결심합니다.

왕안석은 22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는데, 이미 30대 후반에 “경전 해석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전 중국에 명망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훗날 왕안석의 변법을 모두 뒤엎어버린 일생의 라이벌 사마광조차도 “‘왕안석이 중앙의 발탁을 고사해서 그렇지, 중앙에 나오기만 하면 국정을 훌륭히 주도할 것’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다”라고 술회했을 정도였습니다.

한동안 지방직만 자처했던 그였지만 황제가 전권을 맡길 의향을 내비치자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대가 이론에만 강하고 세상사를 처리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하오?”(신종)

“본디 이론이 실천을 이끄는 법입니다. 소위 이론가라는 자들이 용렬했기 때문에 이론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다고 오해받은 것입니다.”(왕안석)

“이 나라의 개혁을 주도할 적임자는 그대뿐이오.”(신종)

“신이 아니면 누가 나서겠습니까?”(왕안석)

희녕 2년(1069년), 신종이 왕안석을 부재상격인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발탁하면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논란이 많은 왕안석의 희녕변법(熙寧變法)이 시작됩니다.

송나라판 친서민대책 ‘희녕변법(熙寧變法)’

희녕변법이 당대에 많은 반향을 가져왔던 것은 그 내용이 매우 파격적인 친서민정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법안 상당수가 국민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을 비롯해 도시 경제를 지탱하는 중소상인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희녕변법의 대표적 법안들을 간단히 소개해보겠습니다.

청묘법(靑苗法)은 정부가 상평창(常平倉)에 보관하던 곡식을 춘궁기에 낮은 이자로 빌려준 뒤 가을에 새 곡식이 수확될 무렵 되돌려 받는 방식입니다.

그동안 농민들이 지주들에게 높은 이자를 지불하며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폐단을 막기 위한 방지책인 셈입니다.

시역법(市易法)은 상평시역사(常平市易司)라는 국영 유통업체를 두고, 물가가 하락하면 상품을 고가로 매수하고 물가가 상승하면 저가로 되파는 방식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는 방안입니다. 또한 상인들에게 연 2할로 돈을 빌려줬습니다.

균수법(均輸法)은 세제 개혁안입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각 지역마다 현물을 납부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역마다 사정이 다른데 중앙정부가 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거뒀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해당 물품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멀리 다른 지방까지 가서 이를 구매하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중간 상인들이 이익을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신법을 내놓은 취지는 분명 정부와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안석은 이런 개혁을 추진하며 자신만만했습니다.

“나는 세금을 더 걷지 않고도 국가 재정을 늘릴 수 있다.”

기대와 다르게 흘러간 변법의 좌초

“온갖 재화들이 수도의 창고에만 쌓여 가고 시중 물가는 수시로 출렁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대지주와 간사한 상인들은 가격 통제를 구실삼아 폭리를 취하고 있어 백성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고 있습니다.”

변법이 시행된 지 3년째, 위계종이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조정에 올립니다.

2년 뒤엔 정협이라는 관리가 기근에 떠도는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을 그린 유민도(流民圖)라는 그림을 황제에게 올려 파장이 일었습니다.

민생을 탄탄하게 해줄 것으로 여겨졌던 희녕변법이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희녕변법이 좌초한 데는 대지주 등 기득권층의 반발과 저항도 분명히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변법의 헛점과 신법당의 미숙한 추진도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북송 시대 이후 주희를 비롯해 대부분의 유명 학자나 사대부들이 왕안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던 이유입니다. 여말선초 개혁을 주도한 정도전도 왕안석을 ‘소인’이라며 평가절하했습니다.

‘친서민대책’의 핵심이자 왕안석 세력(신법당·新法黨)과 반대 세력(구법당· 舊法黨)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청묘법부터 보겠습니다.

당초 대지주로부터 영세농을 보호하겠다고 만든 제도였지만 막상 현장에선 부작용이 적지 않았습니다.

과거엔 농민이 대지주와 구두로 가격 협상을 벌여 즉석에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국가에서 이를 주관하자 신청하고 재가를 받는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됐습니다. 신청절차를 하나씩 밟을 때마다 탐관오리들에게 뇌물을 찔러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는 오히려 부자들에게 높은 이자를 뜯길 때보다 못한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새로운 제도를 빨리 정착시키겠다는 과욕도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전국 각지에 매년 의무적으로 지켜야하는 대출 하한 규정을 하달한 것입니다. 이때문에 가난한 농민들은 물론 중산층이나 부농까지 억지로 곡식을 빌려 이자를 납부해야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속출했습니다.

이에 한 간관이 “청묘법은 수탈의 정책이다. 지방에서는 관아에서 돈을 풀고 강제적으로 이자를 내게 하고 있다”고 고발하자 왕안석은 비판하는 관료들을 파직시키는 강수로 맞섭니다. 청묘법 파동을 계기로 그간 개혁을 지지했던 구양수 등 유명 인사들이 왕안석에게 등을 돌리게 됩니다.

시역법도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시역사는 시장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기구였지만 투기거래상으로 변질됐습니다. 비싸고 잘 팔리는 품목만 집중적으로 사들이는데 바빴습니다. 그래야 정부에서 하달한 이윤 지표를 달성하고, 일부를 자기 주머니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녕변법 후 신종은 32곳이나 되는 궁내 창고에 비단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창고를 추가로 지었습니다. 국부가 중앙정부로 집중되자 민간경제는 얼어붙기 시작했고, 그 피해는 영세 농민과 상인에게 더 큰 타격으로 돌아갔습니다. 희녕변법을 반대했던 소동파는 “차라리 상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비하지 못할 것”이라며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중국의 유명 역사학자 이중톈은 왕안석의 개혁을 놓고 “부패를 도운 변법의 아이러니”라며 다음과 같이 남겼습니다.

“탐관오리들이 개혁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근거 없는 속설이다. 오히려 아무런 일이 없는 상태를 두려워한다.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그들은 기회를 틈타 날아가는 기러기 털도 뽑을 태세로 제 잇속만 챙겼다.” (이중톈, 『제국의 슬픔』 中)

문재인 정부가 실시하는 소득주도성장 등 경제 정책을 두고 논란이 뜨겁습니다.

정부는 최저임금을 올려 성장을 견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현장에서는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16.4%를 올리면서 나타난 각종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최저임금 제도 홍보차 현장 답사를 갔다가 일부 상인들로부터 “현실을 너무 모른다”며 냉대를 받기도 했죠.

강남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며 내놓은 규제책도 당초 예상과 다른 결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한 동기’를 앞세워 정책 추진에만 힘을 주다가 현실과의 괴리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생깁니다.

송나라는 희녕변법을 실시한 지 60년 만에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변법을 놓고 정계가 구법당과 신법당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샅바 싸움을 벌인 탓입니다. 이때문에 이들 모두 ‘희풍의 소인배’(신법당), ‘원우의 간신(구법당)’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뒤집어 썼습니다. 국가에 대한 책임에 여(與)와 야(野)가 따로 있을리 없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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