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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집 가까이에 큰 호수가 있어 봄부터 찬바람이 불기까지는 거의 매일 호숫가를 걸었다. 가까운 곳에 강도 없고 바다도 없으니 호수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에겐 큰 기쁨이 되었다. 호수에 바람이 불면 호수의 얼굴엔 가느다란 띄가 겹겹이 생겨 온 표면에 멋진 무늬를 만들기도 하고, 비가 내리는 날엔 무수히 많은 동그라미를 그려 신기한 파장을 그려놓기도 하였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하늘이 호수인지, 호수가 하늘인지 빽빽히 채워지는 눈송이에 걸음을 멈추고 눈사람이 되기도 했다.

호수는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 얼굴을 바꾸었다. 이른 아침엔 하얗게 내리는 고요가 가득한 옅은 푸른빛이었다가, 낮 시간에는 푸른 청녹색 빛을 띄고, 해가 떨어지는 저녁녘에는 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 신비로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하였다. 둥그런 호수에 내려앉은 별들은 어릴 적 고향의 친구들과 툇마루에 앉아 두런두런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웠던 유년의 시간으로 나를 이끌어 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호숫가를 걷다 보면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라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속 편지를 띄우기도 하고, 아직도 기억나는 동요들을 흥얼거리며 호숫가를 몇바퀴나 돌기도 했다.

얼어붙은 겨울호수를 바라보다 살같이 날아가버린 시간 속에 저기 나무처럼 가늘게 서있는 내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올해로 시카고에 정착한지도 40년이 되었다. 그동안 수도 없는 계절을 보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서로를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살아왔다. 호수는 내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주었다. 아프게 찌르는 삶의 무게 속에서, 품어야 할 것을 품을 수 있는, 내려 놓아야 할 것들을 내려 놓을 수 있는, 춤추고 싶도록 행복한 시간 일지라도 슬픔을 당한 이웃을 보고 내 감정을 제어 할 수 있는, 격하지 않게 유유히 아픔의 주름을 흘려 보낼 수 있는..... 호숫가를 걷는 나는 늘 호수의 큰 품에 안겨 동그래지고, 푸르러지고, 깊어지고 뿌옇던 마음이 맑아지곤 했다.



창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호수에도 눈이 쌓이고 앙상한 나무가지마다 눈꽃이 핀다. 높은 자도 낮은 자도, 부유한자도 가난한자도, 행복한 자도 불행한자도 모두가 빛나는 눈꽃들이다. 하늘 아래 똑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눈꽃 편지

잊고 지냈던 너를 찾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언어와 말투와 표정을 가져간
널 원망하지는 않겠지만
거의 너를 잊어갈 즈음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눈꽃이 내렸습니다

샤갈의 마을에도 눈발이 날리고
염소와, 바이올린 켜는 악사와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살고 있고
편지를 전하는 사내는
시간을 툭툭 끊으며
꿈같은 세월을 깁고 있습니다

꽃이 피는 게 그냥
피어나는 게 아니었다는
순간마다 찌르고 다가서고 멈추기를
움이 틀 때까지,
불그스레 멍들 때까지란
사실을 알고 나서
힘겹게 편지는 배달됐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구만리나 먼 곳
문밖에 흩어지는 너에게로

[신호철, 시카고 문인회장]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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