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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디아스포라, 엄마의 땅

이사를 간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고 결단이다. 강산이 몇 바퀴 바뀐 세월, 익숙히 밟아오던 땅을 떠나 타지로 이주 한다는 것은 용기다. 떠남은 사람과 장소를 기억으로 바꾸는 일, 물과 흙을 바꾼다는 것은 만만치 않는 일이다. 25년을 넘게 살아온 롱아일랜드에서 뉴저지로 이사를 왔다. 나라에서 나라를 옮긴 것도 아닌데,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한 것뿐인데, 몸에 익은 결별의 서운함과 낯선 것의 두려움에 잠시 흔들렸다.

이사 오던 날, 산더미 같은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 텅 빈 집과 마당 구석구석에 마지막 눈을 맞추며 함께 살아온 날의 기억과 감사로 마음이 울컥 했지만 지나친 감상주의는 애써 외면하였다. 새로운 땅의 신고식은 불편을 동반한다. 주소변경을 시작하여 운전 면허증, 전기, 수도…. 복잡한 절차는 당연한 통과의례 이지만 슈퍼마켓, 미장원, 모든 것을 새로 찾아야 하는 것은, 새로 이민을 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삿짐 센터에서 내려놓은 보따리 앞에 털썩 주저앉자 멍 하게 앉아 있다 보니 수십 년 전 뉴욕으로 이민 오던 날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아버지.엄마.언니.동생들 친구 모두들이 공항에 나와 작별을 서러워하며 어찌나 눈물을 흘리는지 나는 그만 너무 슬퍼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공항의 유리 스크린 문이 닫히며 사라지던, 돌아서 울던 그들의 힘없는 손짓을 잊을 수 없다. 떠남은, 이토록 뼈 아픈 아픔을 동반하고 새 땅의 적응은 비장한 각오를 요구한다.

세상이 좋아져 일일생활권에 있다. 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의 한계, 디아스포라의 삶은 명백한 투쟁의 삶이다. 큰 딸애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담임선생님과 어눌한 영어 실력으로 면담하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지도 못 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이민자로서의 삶이 한 스러워 그만, 딸아이의 담임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그날을 기억한다. 그렇게 가슴 쓰린 세월을 버티고 살아온 엄마의 억척의 힘이라면 이제 와서 적응 못 할게 무엇이겠는가. 홀로 산을 넘어 바다 건너 내 여기까지 와서 버티었는데 칡넝쿨을 헤치고 씀바귀 물을 삼켜 먹은 그 고약한 세월의 수업료가 어딘데 이제, 여기서 약해지는가.



나는 잠시 도시와 도시를 이사하며 의기소침 작아진 아이에서, 여인에서, 다시, 엄마가 되는 거야 라고 속으로 되뇌며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느린 옮김의 연속이 아닐까. 끝없이 되풀이되는 만남과 이별, 새로움과 낯섦 사이에서의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 명민한 사람은 낯선 것이 새로움이라는 것쯤은 일찍이 깨우쳐야 하고 쓰디쓴 병이, 약이 되는 날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아야 할까. 아무도 없는 이 땅에 와서 자식을 낳고 가슴 따스한 사람들을 만나고 뿌리를 내린 디아스포라의 지혜를 다시 한 번 불러 모아야 할 것이다.

요란한 전화 소리에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난다. "엄마, 이사 와서 어때? 적응은 괜찮아?" 수화기 저 편에 딸아이다. "이민도 왔는데 못 할게 뭐 있니, 그때는 돈이 있었니, 자식이 있었니, 걱정 마라." "맞아! 엄마가 일구어낸 땅에 내가 태어난 거야." "디아스포라의 여인! 엄마는 강해!" "엄마는 또 새로운 땅을 일구어 낼 거야, 엄마! 파이팅!" 딸아이와 전화를 끊고 일어서는 다리에 힘이 불끈 솟는다. 우리가 누구인가. 억척같이 이 땅에 뿌리내린 디아스포라 아닌가. 다시, 긴 호흡을 하고 새로운 땅, 제2의 삶의 터전에 씨앗을 뿌린다. 문을 여니 앞마당 눈 녹은 언 땅을 밀고 새 순이 파릇이 올라온다.


곽애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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