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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호 역사 칼럼] 야바위꾼의 아들 석유왕 록펠러

현대 경제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석유이다. 석유 가격이 오르내림에 따라 세계 모든 국가가 울고 웃는다. 석유가 인간의 생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운송수단의 연료가 될 뿐만 아니라 주요 생활용품의 주재료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플라스틱 제품은 석유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석유에 대해 남보다 일찍 눈을 뜬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록펠러(John D, Rockefeller)이다. 미국 사람들은 한결같이 Rockefeller를 ‘라커펠러’라고 발음한다. 하지만 우리의 머리속에는 이미 ‘록펠러’라는 발음으로 자리 잡아서 ‘라커펠러’가 무척 어색하다.

록펠러는 1839년 뉴욕의 태어났다. 평생 떠돌아 다니면서 엉터리 약을 팔던 야바위꾼을 아버지로 둔 그는 어려서부터 장사에 수완을 발휘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셈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회사에 취직하는 그는 20대 초반에 회사의 대우에 불만을 품고 혼자서 창업하기로 했다. 잡다한 사업에 수완을 발휘하여 꽤 돈을 번 그에게 행운이 찾아 왔다. 미국에서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유전지대가 크게 개발되고 있던 그때에는 그는 한 가지 일에 몰두했는데, 바로 석유를 정제하는 정유 사업이었다. 석유를 정제하여 이용하면 된다는 사실이 아직 보편화하기 전이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 석유를 캐내는 데만 열중해 있었다. 그는 남들이 석유 시추에만 열중할 때 석유 정제 사업에 몰두했다. 상대적으로 경쟁자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와 직접 연결되어야 돈을 벌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당시에는 석유의 쓰임새가 제한적이었는데, 주로 등불을 밝히는 등유를 생산하기 위해정유를 했다. 원유를 정유하여 생산되는 물질 중에 등유를 제외하고는 모두 폐기 처분했다고 한다. 원유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이용하는 지금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때 당시의 정유라는 것은 결국 등유만을 뽑기 위한 생산과정이었다.

그런데 등유 정제 기술이 아직 완벽지 않던 때라 등유의 휘발성이 들쑥날쑥한 바람에 자주 화재가 발생했다. 이런 문제점에 착안하여 록펠러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자신의 회사 이름에 Standard(표준)라는 말을 넣기로 한 것이다. 즉 표준이 되는 등유이므로 안전하다는 점을 소비자의 마음에 심어주고자 한 목적이다. 1870년 스탠다드 오일이라는 회사를 세운 그의 생각이 적중하여 스탠다드 오일의 제품을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미국의 각 지역에 공급하는 운송수단이 문제였는데, 철도를 주름잡고 있던 밴더빌트와 손을 잡은 그는 곧 정유 산업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작은 정유 회사들이 생기기만 하면 사들여 합병하는 전략을 폈다. 욕심이 지나친 그는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즉 합병하는 과정에서 정부를 매수하여 경쟁 회사들에 간섭하게 하거나 직접 경쟁 회사들에 협박을 가하여, 경쟁 회사는 꼼짝없이 회사를 록펠러에게 상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록펠러의 행위가 나중에 반독점법의 철퇴를 맞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여하튼 록펠러는 이런 방법으로 미국의 정유 산업 9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30살을 갓 넘긴 때였다. 나중에 Standard Oil 회사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독점기업 방지법에 따라 된서리를 맞다 34개 회사로 분할되었으니 말이다.

항간에 록펠러가 유대인이라는 소문은 있으나 사실이 확인된 적은 없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다. 교회에 내는 십일조 이외에는 기부하기를 싫어하던 그는 1892년 시카고대학을 설립하여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 후에도 무자비하게 사업을 추진해 가던 중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한 그는 “이제는 그만 내려놓으라”고 하는 목사의 말을 듣고 크게 깨우친 바가 있어 57세에 은퇴를 결심했다. 1913년 록펠러재단을 설립하는 등 록펠러는 과거를 후회하듯 자선사업에 몰두하며 여생을 보냈다. 92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굵고도 길게 살다 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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