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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내가 지닌 것들의 가치

[애틀랜타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8/08/26 16:28

나이가 듦을 가장 실감 나게 하는 것은 건망증이 아닐까 싶다. 아침 러시아워를 뚫고 힘겹게 도착한 다운타운 교육장에 들어서고서야 안경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더위가 조금 사그라진 듯해서 오랜만에 했던 화장을 잠시 손보려고 벗은 안경을 차에 두고 온 것이었다. 돋보기 하나쯤은 있을까 싶어 가방 속을 탈탈 털어 보았지만, 없다. 베개에 눌리고, 책에 치이고, 새벽 잠결 내 발밑에 깔려 찌그러지고 빠개지던 그 많은 돋보기, 열 개도 넘게 있는 그것들이 하필이면 지금 하나도 없다니.

안경 없이는 글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내 난시가 문제가 아니라, 강의록을 읽지 않고서는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 영어 실력이 더 큰 문제였다. 강의를 들으며 간간이 메모해야 할 사항들은 또 어쩔 것인가. 그뿐이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가 강사가 내어주는 질문지에 내 의견을 적어 제출해야만 출석이 인정되는 프로그램이었다. 순식간에 마음이 경직되었다. 시작을 알리는 강사의 음성이 웅얼웅얼 귓바퀴에서 맴돌고, 머릿속이 팽팽해졌다.

갑자기 반짝하는 것이 있었다. 스마트폰에 있는 돋보기 기능. 맞다. 이래서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다. 교육생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어쩌면 무례해 보일까 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어쩌겠나. 내 차는 반 마일 떨어진 주차장에 있고 내 몸은 이미 21층 꼭대기에 와 있는걸. 더구나 이 과정을 놓치면 먹고 사는 일이 삐걱거릴 판인데. 중간 휴식시간이 되자마자 부리나케 파킹랏을 향해 뛰었다. 결국 차 안에서 찾아낸 여벌 돋보기 덕분에 무사히 교육을 마쳤다. 수료증을 받아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건너뛴 점심의 시장기가 싸르륵거리며 빈속을 긁어내렸다. 서글퍼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이 듦으로 만나야 하는 소소한 일들이 점점 힘에 부친다. “ 너, 힘들었지? 젊지 않은 나이에 알량한 영어 실력으로 미국 애들 틈에 앉아서 진짜 애썼다.” 배고픔보다는 아침 내내 시달렸던 내 마음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 여자 혼자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곳은 없을까. 당연히 있다. 85번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285번 도로로 차 머리를 돌렸다. 종착지는 유럽풍의 노천카페가 달린 레스토랑. 머뭇머뭇 주머니 사정이 고개를 들었지만, ‘괜찮아, 너 한 번쯤은 돈 쓸 자격 충분해.’라고 스스로 대답했다.

살다 보면 사는 일이 외로운 노동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육하원칙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작은 사건으로도 자존감의 도수가 제로 이하로 떨어져 버린 날, 무엇이 나의 실재이고, 어떤 것이 나의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어 생각이 뒤죽박죽인 날, 그런 날엔 이상하게도 호수나 강가보다는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 있는 노천카페를 찾는다.

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햇살을 밟으며 걸어가는 사람들과 좁은 차선을 따라 꼬리를 물고 달리는 차들의 행렬. 마주 보이는 빌딩 숲 사이 육중한 유리창에 투영된 하늘과 구름. 서로의 그림자를 품고 마주 서 있는 빌딩들. 인도가 훤히 보이는 테라스에 놓인 탁자 위에 방금 내린 블랙커피 한 잔과 레드 벨벳 케이크 한 조각을 올려놓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거리의 풍경들을 바라본다.

만약에 내가 지닌 것들의 가치를 지켜 가는 것이 삶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 도심 한가운데 빌딩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속에서 삶을 아우르는 사람들이 지닌 가치 때문일 것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나 자체를 보는 것을 모르고 살았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실수를 피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허튼 감정으로 삶을 왜곡하려 했었구나. 내가 지닌 것들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괴로운 것은 나 자신인데.

도심 한가운데 노천카페에서 내가 지닌 것들의 가치를 찬찬히 돌아본다. 때로는 인공적인 도시의 모습과 가공된 삶의 소리만으로도 그냥 마음이 위로되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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