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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 목사의 한국 교회사]믿음, 애국심, 그리고 3.1절

역사 가운데 기독교 신앙과 애국심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했던 “밀당”(밀고 당기는) 관계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학교와 병원을 지었던 열심에서 보듯이 더 나은 시민이 되고, 더 나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신앙인들은 식민주의나 불의의 시기에는 저항의 자리에 서기도 했습니다.

서구 식민주의에 피해가 컸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다르게 한국 역사에서 개신교는 처음부터 애국을 가르쳤습니다. 조선 말의 독립협회나 민족교육은 기독교 신앙과 떨어질 수 없었고,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려는 전통이 자리잡았습니다.

그 중 3.1 독립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앞장섰던 대표적인 애국운동입니다.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체포된 기독교인이 38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전체 체포자의 17. 6 %에 달했는데, 당시 기독교인이 국민의 1%가 조금 넘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들의 헌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유관순처럼 기독교 학교 학생들과 교회들이 각 지역의 만세 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3.1운동은 기독교 신앙과 분리할 수 없는 민족운동입니다.

3.1. 만세운동 당시 미국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어떠했을까요? 상항감리교회 이대위 목사의 이야기를 돌아보겠습니다. 평남 강서 출신인 그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로 유학 온 때가 1903년이었습니다. 1913년에는 U. C. 버클리에서 사회학사학위를 마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미주 최초의 한인교회 중 하나인 상항감리교회의 창립에 참여했고, 1911년부터 담임목사가 되어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 곳에서 목회하였습니다.



당시에도 교회는 이민자들을 위한 영혼의 집이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유학생들의 이민국 서류의 도착지가 이대위 목사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유학생들의 비용과 학비를 지원하고 심지어 개인의 치료비까지 보조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의 통역을 자처하여 당시 여권을 가져올 수 없는 유학생과 사진신부의 신원보증과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사진신부를 돌보고 주례까지 담당한 인원이 70명에 달하고 수백 명의 유학생이 도움을 입었습니다. 교회의 주보는 복음 전도 뿐 아니라 동포들이 알아야 할 미국과 세계정세, 그리고 민족정신 고양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사역은 교회 안에만 국한 될 수 없었습니다. 1910년 안창호와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북미지방 부회장을 맡았던 그는 한일합방 이후에는 애국동맹단을 결성하였습니다. 국민회는 한국의 상황에 대한 세계의 여론을 형성하고, 임시정부의 전단계가 되어 민족의식 고취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대위는 스스로 한글식자기를 발명하고 신한민보를 발간하여 독립운동과 한인사회의 언론을 담당하였습니다.

100년 전 3.1독립운동의 소식을 들은 이대위 목사는 어땠을까요? 당시 그는 국민회 북미대표로 대한독립선언을 알리고, 외교와 독립운동에 적극 헌신하여 한인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는 ‘독립 운동가’로 평가받고, 우리에게는 민족을 위한 목회자로 존중 받습니다.

우리는 3.1절을 맞이할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라 더 그렇습니다. 3.1운동이 다시 일어난다면 미주의 한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100년 전과는 다른 모양일 수는 있겠으나 한인교회가 민족을 위한 운동의 중심에 서지 않을까요? [교회사 박사]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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