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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Crispy!

Crispy! 내가 아주 좋아하는 영어 단어이다. 그리고 나는 이 단어를 적재적소에 많이 이용한다. 한번은 중환자실 근무 중에 모니터에 나오는 심박동, 우심방의 수분량 측정도, 혈압, 호흡, 산소 포화도를 나타내는 곡선이 너무 반듯해서 "Everything is nice and crispy" 하고 의사한테 보고하니 "Wow! I never heard that kind of expression but that sounds terrific"하며 만족한 미소를 돌려준다. 이 말의 사전적 정의는 '파삭파삭한, 아삭아삭하는, 부스러지기 쉬운, 활발한, 산뜻한' 이다. 건강한 자의 모니터는 crispy하지만 병이 깊어 갈수록 곡선은 물렁해지고 늘어진다.

노화가 진행되면서 인체의 모든 근육은 탄력을 잃게 된다. 노인들이 자주 사레들리는 이유는 식도의 근육이 늘어나 음식이 기도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이 60이 넘으면 부정맥(atrial fibrillation-흔히 a-fib으로 통용된다)을 많이 진단 받게 된다. 이 또한 심장근육이 탄력을 잃어 우심방이 crispy하게 심방을 수축하지 못하고 불규칙하게 젤로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이처럼 시간이라는 괴물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희석해서 결국은 사라지게 한다. 사람의 성격도 crispy한 사람을 난 좋아한다. 활발하고 산뜻하고 겉과 속이 투명해서 신경전에 쓰이는 시간낭비를 막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가 난 좋다. 내가 좋아하는 이 단어는 청명한 가을 날씨에 가장 적합해서 한 층 더 빛을 본다.

가을, 특히 11월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젖은 가을 날은 애잔해서 좋지만, crispy한 가을 날에 찰랑찰랑한 햇빛이 옷 속을 촐랑대면 발걸음이 날개를 달아서 좋다. 구르몽의 낙엽을 노래하며 바삭거리는 낙엽을 좇아 숲 속을 찾는다. 황홀한 오색단풍을 뚫고 새어 나오는 찬란한 색채의 향연! 생의 절정을 향해 노래하는 그들의 몸짓이 내 속으로 조심스럽게 번져 온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를 가득 채운다. 나는 커지고 부풀어 행복한 풍선이 된다. 강렬한 환희가 내부를 가득 채워 가벼워진다. 높이 날아 한 발은 벌써 지구 밖으로 떠난다. 자연에 순응하며 거침없이 던지고 태우는 자아연소!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 감사하며 더욱 깊어지는 맵시가 나를 감싼다. 눈을 감는다. 하늘에서는 옥빛 물이 떨어지고 나는 솜털구름 위에 눕는다. 바슬바슬한 바람이 잎새 한번 간질이고 내 콧잔등 위에 머무른다. 연노랑이 심호흡을 하는 사이, 주황은 주홍으로 옷을 갈아입고 단풍잎은 갈색을 토해 낸다. 먼 곳에서 환희의 오케스트라가 울려 온다. 솜털구름은 어느덧 새털구름이 되어 나를 찬 서리 내리는 은빛 세계로 떠민다. 바스락 그림자가 바짝 뒤따라 온다.



해마다 11월이면 찾아 오는 나의 친구, 가을 소묘는 오늘도 나에게 삶의 촉기와 윤기를 준다. 해마다 이렇게 가을에 얻은 에너지로 겨울잠에 든다. 아끼고 아껴 그 에너지를 뿌리에 저장한다. 봄이 오면 새 생명을 잉태하기를 꿈꾸며 한없이 머물고 싶은 이미지를 내린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릴케의 시를 읽으며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받아들이고 내적 성장을 갈망하는 바삭한 가을과 살찌는 겨울을 맞자고 다짐해 본다. 만약 우리에게 crispy한 가을이 없고 여름에서 곧바로 겨울로 간다면 과연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과일은 즐길 수 있을까. 예술가들은 살아 남을까. 가을은 삶을 풍성하고 활기차게 해준다. 행복하자 우리, 여우 꼬리보다 짧은 crispy한 이 가을날을!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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