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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그때는 그랬다

그 여자 이름은 상숙이었다. 성은 모른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어른들이 ‘상숙이가’, 이모들이 ‘상숙이 년이’라고 수군덕거려서 귀에 박혔나 보다. 이상도 하지. 결혼 전에 만났던 남자들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아버지 내연녀 이름은 평생 잊지 못하다니! 나 자신을 믿을 수 없다.

극성스러운 이모들이 엄마를 끌고, 나를 밀며 도착한 아파트 단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짙은 회색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자 거대한 괴물과 맞닥뜨린 듯 섬찟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며 어디론가 숨고 싶어 두리번거렸다. 그때 오른쪽 둔덕에 파란 용달차 서너 대가 눈에 띄었다. 내 눈에 왜 용달차 대여점이 눈에 띄었을까?

아파트 번호를 모르는 이모들은 건물 1층 오른쪽부터 벨을 누르라며 내 등을 쿡쿡 떠밀었다.

“아픈 엄마를 돌봐야 해. 앞장서지 않고 뭘 해. 아파트마다 벨을 눌러. 찾을 때까지.” 이모들이 번갈아 내 등을 철썩철썩 내려치며 떠밀었다.



키 작은 이모가 발돋움해서 상숙이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큰이모가 아귀처럼 달려들어 패던 장면은 선명하지만, 지면상 독자들이 상상하시길 바란다.

“이제 그만해. 사람 죽이겠다. 고만하지 못하겠니?”

힘없는 목소리로 엄마가 이모들에게 소리쳤다.

“너도 불쌍한 팔자구나. 우리 집에 함께 가서 나와 살자. 내가 병이 들어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으니 네가 도와다오.”

파란 용달차가 와야만 싸움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내 머리통을 쳤다.

“엄마, 오다 보니까 가까운 곳에 용달차 서너 대가 있던데 용달차 아저씨보고 여기에 있는 짐을 싣고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할까?”

엄마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일이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용달차 대여점으로 달려갔다. 용달차를 타고 아저씨와 함께 와서 대충 짐을 실었다. 그리고는 조수석에 앉아 우리 집으로 안내했다. 나의 단조로운 어린 시절은 그날로 끝났다.

상숙이 아줌마는 우리와 얼마간 함께 살았다. 키가 크고 무척 말랐다. 그리고 착했다. 아침에 내 도시락을 싼 보자기 틈에 용돈을 넣어주며 학교에 잘 다녀오라며 슬픈 미소를 짓곤 했다. 덕 많은 엄마와도 잘 지냈다. 그러나 그녀와 사는 것에 저항하는 몇몇 사람이 있었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린 그녀는 아버지를 떠났다. 엄마가 상도동에 전세를 얻어주고 다달이 생활비를 보내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그녀와의 끝이다.

그 사건은 나에게 상처로 남지 않았다. 요즈음 코로나19를 통해 사람들이 삶의 지혜를 터득해 고난의 시간을 헤쳐나가듯 오히려 나는 상처를 받을 때마다 더 나은 방향으로 비행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수임 화가·맨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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