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문학칼럼] 행복을 버무리다

정란숙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우수상

마켓에서 김치를 이민 온 후 처음으로 샀다.
익숙하지 않은 맛 때문인지 식탁에 오르자마자 찬밥 신세가 됐다. 산 김치가 이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우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입맛, 정확히 말하면 혀의 기억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어서 어머니의 김치에 반백의 세월 동안 익숙해져 있는 남편이나, 이십여 년간 길들여 있는 아이들을 탓 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집 김치는 지금껏 시어머니께서 담가주셨다. 더 늦기 전에 올해부터는 내가 김치를 담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작년에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담아 봤지만, 모양은 그럴듯한데 맛이 전혀 달랐다. 나와 가족들은 내가 만든 김치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결론을 내릴 무렵, 지인의 소개로 한국에서 오는 김치를 사 먹게 되었다. 다행히 식구들 입맛에 맞아 한시름 덜게 되었지만 문제는 가끔씩 늦게 도착한다는 것 이었다. 한 달 전에 주문한 김치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데 또 배송이 지연된다는 연락이 왔다. 식품이다 보니 통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여태 김치 걱정 안하고 살다 하려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새삼 아주버님 댁에 가 계신 어머니가 감사하고 그립다.

간암으로 이십 년 가까이 투병했지만, 비교적 건강하셨던 아버님이 작년 1월부터 갑작스레 나빠지셨다. 처음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셨던 날, 아버님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놀란 가슴을 추스른 어머니가 뜬금없이 우리 집 김치 걱정을 하셨다. 예상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걱정에 의아해하며 김치는 아직 넉넉하게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 드렸지만 그 뒤로도 아버님의 병세가 나빠져 응급실에 갈 때마다 우리 집 김치 걱정을 하셨다. 그 와중에 우리 집 김치걱정을 하는 이유를 한참이 지나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건 아마도 점점 위중해져 가는 아버님을 보면서 느껴지는 몹쓸 생각이 기우이며, 아무런 문제 없이 퇴원해 집으로 돌아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 될 거라는 주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집 김치걱정이 아주 뜬금없는 것은 아니어서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결혼은 늦게 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나는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모든 엄마가 그렇겠지만, 우리 엄마도 딸들은 당신이 살아온 삶과는 다르게 살았으면 하셨고, 결혼한 후에도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를 바라셨다. 그런 이유로 딸들이 결혼하면 김치나 밑반찬 정도는 손수 만들어 줄 요량으로 부엌일을 따로 가르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결혼발표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을 텐데, 미국으로 떠난다고 하니 처음엔 결혼을 반대하셨다. 그런 친정엄마의 마음을 헤아린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딸처럼 여기며 사랑하고 부족한 점은 서로 채워가며 지낼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위로하셨다.
결혼하고부터 올 초까지 우리 집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김치가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직장에서 일하는 며느리 힘들까 봐 한 번도 같이 담자고 하신 적도 없었고, 김치가 떨어질 때쯤이면 어떻게 아셨는지 담가 놓았으니 가져가라고 전화를 해 주셨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민망할 만큼 자주 우리 집 김치 걱정을 하셨다. 연로하신 어머니의 걱정을 헤아리지 못한 게 죄송하여 나름대로 해결 방법을 찾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알음알음 지인을 통해 그런대로 맛이 괜찮은 김치를 사 먹고, 가끔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레시피와 어깨너머로 배운 어머니의 솜씨를 떠올리며 겉절이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아버님이 떠난 슬픔으로 힘드신 어머니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김치 걱정하실 때마다 일이 바쁘다, 배추 품질이 좋지 않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김치 담그기를 미루었다. 11월 중순이 되자 더는 미룰 핑계가 없어 어머니와 함께 김치를 담그게 되었다. 겨울답지 않게 날이 따뜻하고 배추도 좋아 어머니는 김치 담그는 날을 잘 잡았다고 연신 흡족해하셨다.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완벽한 김장철 복장을 하신 어머니는 마치 결전의 날에 출정하는 장수처럼 기운이 넘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랜 세월 어머님이 담근 김치를 얻어먹기만 했던 불량한 며느리는 이번 기회에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비법을 제대로 전수 받아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배추를 잘 절여야 김치 맛이 좋다며 배추를 절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다가 한 말씀 던지셨다.


"너그 아부지 살아 계실 땐 배추 절이고 씻는 건 다 너그 아부지가 하셨다. 그래서 힘들지 않게 김장을 할 수 있었지" 하며 배추에 소금을 뿌리셨다. 그런 어머니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어쩌면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님을 향한 그리움과 푸릇푸릇한 배추처럼 고개를 드는 자식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절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쓸쓸해 하시던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밤이 늦어지기 전에 끝내야 한다며 서둘러 김치 소를 만드셨다. 마침내 절인 배추에 소를 넣고 김치 통에 차곡차곡 담으시며 "아이들이 어릴 땐 춥고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김장해서 장독에 가득 담아 두고 뜨뜻한 방안에서 깨끗하게 손질한 이불을 덮은 아이들이 고구마나 귤을 까먹으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 사납게 윙윙거리는 겨울바람 소리가 희한하게 그 밤에는 참 듣기 좋은 노랫소리처럼 들리더라" 하시며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셨다. 그제야 비로소 김치를 담그는 것이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와 닿았다. 올 봄부터 그토록 김치를 담가주고 싶어 하셨던 이유는 아마도 당신의 일상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과 김치를 담그는 일보다도 담근 후에 느꼈던 그 행복을 내게 물려주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가족을 위해 직접 김치를 담그며 느끼게 되는 행복을 체험해보라고 말이다.
김치를 먹다가 남편은 가끔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을 꺼내놓곤 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서너 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자식들을 위해 아버님은 김치를 물에 씻어 뼈를 바른 갈치와 함께 밥 위에 얹어 먹여 주셨다고 했다. 그 맛을 생각하면 행복해진다는 남편의 기억 속에서도 김치가 행복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어머님의 김치는 가족 모두에게 행복을 안겨준 것 같았다.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김치는 묵힌 시간만큼 깊고 그윽한 맛을 내었다. 갖은양념과 손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김치는 맛있는 묵은지가 되어 올 여름까지 우리 집 밥상을 든든히 지키며 식구들의 입맛을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할머니 표 김치’를 넣어 만든 ‘엄마 표 돼지갈비 김치 찜’인데 해 줄 때마다 맛있다고 감탄해 나를 춤추게 했다. 사랑이 듬뿍 담긴 맛이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먼 훗날 아이들의 자녀들에게도 행복한 추억의 음식 이야기로 전해 졌으면 좋겠다.

사방이 어둠에 묻힌 밤이다. 김치 없는 텅 빈 냉장고 때문인지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 소리가 차갑고 쓸쓸하게 들린다. 작년 이맘때는 온종일 김치를 담그느라 몸은 지치고 고단했지만, 냉장고에 가득 채워진 김치 생각 만으로도 마음은 더없이 행복하고 든든했었는데.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더 추워지기 전에 김치를 담아야 한다며 걱정을 하셨다. 전화를 끊고 나니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어머니를 보냈다' 던 유대인들의 속담이 떠올랐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랜 세월 그런 마음으로 김치를 담아 주셨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여기며 받아먹고 산 세월이 죄송했다. 아무리 일이 많고 사는 게 바빠도 어머님이 외롭지 않도록 좀 더 자주 전화를 드려야겠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김치를 버무린 것 처럼 나도 행복을 버무리며 살아야 겠다.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해가 비치기를 "

-켈트 족의 축복 기도 중에서-


정란숙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우수상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