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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삶] 꿈을 베끼다

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 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가던 저녁의 여린 날개/ 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 (…)눈동자를 베낀 깊은 물/ 물에 든 고요를 베낀 밤하늘/ 밤하늘을 베낀/ 박쥐는 가을의 잠에 들어와 꿈을 베꼈고/ 꿈은 빛을 베껴서 가을 장미의 말들을 가둬두었다/ 그 안에 서서 나를 자꾸 베끼던 사랑은 누구인가/ 그 안에 서서 나를 자꾸 베끼는 불가능은 누구인가

-허수경 시인의 ‘베낀’ 부분



좋은 것을 만나면 베끼고 싶어진다. 시집을 읽다가 은유가 빛나는 시를 보면 비망록에 베껴 적는다. 그렇고 그런 일상이지만 정갈하고 멋스럽게 꾸려가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사는 모습을 베끼고 싶다. 그런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고 감동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다 보니 삼라만상이 다 베껴가는 연결고리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세상은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안에서 끊임없이 베껴가며 진화하는 과정 아닌가 싶다.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베낀 것이 비행기이고 향유고래가 물살을 헤치는 모습을 보고 베낀 것이 잠수함일터이고 오늘은 어제를 베껴 미래를 만들어 간다.

베낀다는 의미는 있는 모습을 그대로 옮긴다는 것이라기보다 베끼려는 마음이 역동적으로 움직여서 더 나은 다른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베끼면 베낄수록 더 숭고해질 것이다. 초록은 베끼면 베낄수록 갈맷빛이 될 것이고 새털구름은 베끼면 베낄수록 더 가벼워질 것이다.

삶의 동력은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는 데서 온다. 누군가에게서 선한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도 한다. 서로 주고받는 영향력이란 내게는 없지만, 그에게는 있는, 그에게는 없지만 내게는 있는 어떤 것들을 나누며 재배치하는 일이기도 하다.

베끼고 싶은 사람이 많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동경의 대상이 있고 믿을만한 사람이 주변에 많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베끼고 싶은 문장이 많은 사람은 감성이 이슬처럼 촉촉한 사람이다. 감각이 파르르 떨릴 줄 아는 유연한 사람일 것이다.

점점 베끼고 싶은 것이 적어진다. 아마도 감동을 유발하는 상황들이 적어지는 것이리라. 세상의 일들이 시들해진 탓일까. 아니면 마음의 겸손이 사라져 깊은 울림이 전달되지 못한 것일까. 그런데도 사랑을, 사랑의 헌신을 베끼려 한다. 차면 이울게 마련인 달의 품성을 베끼려 한다. 꿈의 빛을 베껴서 노년의 겨울 양식으로 삼으려 한다.

하늘을 차고 오르는 독수리를 베끼고, 백 년 만의 개화라는 용설란이 피워낸 꽃을 베끼고, 갈대숲의 휘파람 소리를 베끼고, 말을 시작하려는 아기의 옹알이를 베끼는 하루, 모아서 좋은 벗으로 삼으려 한다.

허수경 시인은 독일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쉰넷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모국어 불모지인 이국땅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며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했다. 말이 시리고 고단한 날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 땅의 우리처럼. 그런데도 담담하게 생의 근원을 탐색하다가 가뭇없이 본향으로 돌아갔다.

고고학을 공부했던 시인은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시간의 뼛조각들이 품고 있는 무수한 이유의 탁본을 떠가며 시를 썼다. 주옥같은 시들은 남겼다.


조성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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