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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골프칼럼' 2010회 박윤숙 프로] '상처'가 있어야…멀리 날아간다

골프서 '똑바로 멀리' 어렵듯
인생에서 '빨리 많이'도 없어

"급한 순간, 여유있는 순간을
어떻게 하느냐가 진짜 중요"

가정 해체·경제적 곤궁으로
인생 '러프'에서 13년간 방황


17년 동안 빠짐없이 썼다. 매회 1400자 전후. 글을 써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안다. 글쟁이도 아니고, 프로 골퍼이자 티칭 프로를 하면서 또 한인사회 곳곳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이룩한 일이다.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칼 립켄 주니어는 18년간 자그마치 2632경기에 연속 출장해 '철인'이라는 전무후무한 명예를 얻었다. 오늘(13일) 2010회 기고를 보낸 '철인' 박윤숙(66) 프로를 만났다.



1번 홀



-'오래, 많이' 썼습니다.

"그렇게 됐네요. 처음 80년대, 원고지에 써서 보낸 시절(한국의 중앙일보에 기고)까지 합하면 25년이 됐어요."

-칼럼의 특징은 뭡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골퍼들의 심리'를 앞 부분에 두고, 골프의 기술적인 면이 뒤 따라오게 쓰고 있어요. 심장이 요동치면 두뇌는 멈추기 때문이죠. 일단 심리적 안정감을 갖도록 했습니다."

2번 홀

-다들 '똑바로, 멀리'치고 싶어합니다.

"잭 니클라우스가 이야기했죠. '골프 코스에 직선은 없다. 신은 반듯한 선 같은 것을 그은 일이 없다'고. 저도 오랫동안 골프를 쳐왔고, 수많은 사람을 가르쳐 왔는데 '똑바로 멀리'라는 게 사람 잡는 거 같아요. 골프를 안 치는 보통 직장인은 아마 '빨리, 많이'를 원할 거 같은데, 역시 그런 일은 없다고 봐야죠."

-'빨리, 많이'? 무슨 말입니까.

"빨리 승진하고, 많이 돈 버는 거죠. 그 사이 깊은 나락이 있다는 건, 골프나 인생이나 같죠."

3번 홀

-골프를 치면 인생이 보입니까.

"생각하는 골프를 하다 보면 과거와 미래의 인생이 보이지만 18홀을 숫자와 싸우다 보면 아무것도 건지질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숫자로 인해 오만가지의 희로애락도 생겨납니다. 학교성적과 사회생활에서의 '숫자'는 높을수록 좋지만, 골프에서의 숫자는 어떻게 해서든 낮추려는 싸움입니다. 욕심을 낮추면 세상이 편해지고 숫자(핸디캡)도 함께 낮춰 지는데 그걸 터득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14개의 다양한 클럽(골프채), 골프장의 제각각 지형, 이런저런 해저드, 그때그때 골퍼들의 심리 상태가 어우러지는 게 골프다 보니, 한바퀴 돌고나면 반드시 크고 작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박 프로의 '티샷'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비즈니스 전공에서 골프 전공으로 바뀐 겁니다. 머리도 좋지 않은데 공부도 안 하는 학생 있죠. 제가 딱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운동이든 다 좋아하는데 깊이는 없고요. 그런데 두 가지는 열심히 했습니다. 태권도는 공인 7단에 오를 때까지 열심히 했어요. 골프도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두 가지는 확실하게 한 것 같습니다. 군 제대 후 유학으로 진로를 변경, 골프를 전공으로 할 때 모두가 정상으로 봐 주질 않더군요. 당시만 해도 골프로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고, 많이들 말렸습니다. 어쨌든 '티샷'을 때렸고, 중간 중간 좌절과 절망 속에 푸덕거리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4번 홀

-골퍼로서 무슨 '무기'가 있었나요.

"잘 쓰면 무기인데 잘못 쓰면 안전핀 뽑아 손에 들고 있는 수류탄 같은 게 있긴 있습니다. 잘못 하면 자폭이고 잘 던지면 무기로 사용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골프에서 진정한 무기는 정신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골퍼는 안전핀을 뽑아 멀리 던진다는 욕심으로 어깨와 손, 온몸에 힘이 들어가 목표에 던지지 못하고 코앞에 떨어뜨려 자신이 상처를 입거나 자폭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죠. 욕심이 발동해서 운 좋게 성공하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실패를 맛 봅니다. 저는 6·25전쟁과 함께 남쪽으로 탈출한 피란민 가족입니다. 전쟁 중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 덕으로 인생 초반기 '흙 묻은 금수저'였어요. 그 혼란기에서 공부시키고, 굶기지 않고, 삼시세끼 했으니 금수저였고, 금수저에 묻은 흙은 오늘 날까지 스스로 닦아가며 살고 있습니다."

5번 홀

-젊은 날 삶의 '러프'는.

"해저드와 러프에 수없이 들어갔습니다. 한마디로 '떫은 감'인데 잘 익은 홍시로 착각하고 살아온 겁니다. 성격 자체가 직설적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 거 같아요. 날카로움을 정직으로 착각하고 살았다고 할까요. 부드러운 쇠가 강한 쇠를 자른 다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원리를 모르고 철없이 살았던 겁니다. 골프에서 힘 빼고 부드럽게 쳐야 공도 멀리 가고 정확도도 생겨난다고 강조하곤 있지만, 나 자신의 삶에 힘을 빼지 못한 거죠. 제 이름을 풀이하면 '진실할 윤(允) 맑을 숙(淑)'입니다. 완전한 여자 이름이죠. 그런데 이름값 하라는 부모님의 유지를 받든다는 게 '까칠 남'으로 잘못 산 거죠."

6번 홀

-'해저드'에 깊이 빠진 적도 있었나요.

"정말 아주 깊은 러프에서 탈출하느라 고생 많이 했습니다. 마음에 상처나 분노의 고통을 참는다는 건 정말 힘들더라고요. '러프'에서 무려 13년을 헤맬 때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갑자기 들이닥친 가정의 해체, 어느 날 아침부터 내 인생의 톱니가 헛돌기 시작했습니다. 막내 딸 아이가 5학년, 둘째 아들이 7학년, 첫째가 9학년 때인데 하루아침에 이 애들 셋을 혼자 키워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선 겁니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이때 화병이라는 게 생기고 분노와 좌절, 타인에 대한 불신까지 생기니 사회생활도 힘들었어요. 깊고 깊은 수렁이었습니다."

7번 홀

-그래도'18번 홀'은 다 돌아야 할 텐데.

"문득 이렇게 살다가는 나는 물론이고 애들도 죽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우선 술을 끊고 이어서 담배도 끊었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골프에서 하찮은 공 하나에 양심을 구겨버리는 일이 없어야 자신감이 살아납니다. 그렇잖아요? 골프에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사회생활도 술술 풀립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러프를 탈출했죠."

8번 홀

-그 당시 신조랄까, 신념은 뭐였습니까.

"보비 존스가 남긴 말로 대신할게요. '골프에서 볼을 쳐올리는 동작은 하나도 없다'."

9번 홀

-전반부를 돌았네요. 좀 쉬죠. 좋아하는 노래는.

"어머님에 대한 애절함이 서려 있는 칠갑산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칸초네인데요, Tony Dallara의 La Novia. 학창시절부터 유독 이 노래에 심취했어요. 음식은 까다롭지 않아 이것 저것 다 잘 먹는데 맛살 넣고 끓인 어머님표 미역국을 좋아해요. 또 뭘 고치고 새로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쉬는 날에는 집에서 고치고 칠하고 가꾸고, 때로는 나무 치기, 텃밭 가꾸기를 합니다. 집에 웬만한 장비가 다 갖춰져 있어서 친구들이 '홈디포'라고 합니다."

10번 홀

-파 3홀과 파 5홀의 차이는.

"파 3에서는 너무 방심하거나 경직되어 홀을 망치는 경우입니다. 대체로 파 3는 거리가 짧아 한눈에 들어오니까 볼을 홀 옆에 붙이겠다는 욕심이 발동해서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업도 잘될 때 과도한 욕심으로 인하여 망치죠. 매사가 눈 앞에 보일 때 조심해야 해요. 침착하게 한걸음 뒤에서 보면 공략방법이 보입니다. 그린 위의 홀(재산)이나 깃발(돈)만 보지 말고 그린 주변의 벙커(사람)나, 해저드(리스크)나 지형(가치)을 잘 살피면 버디나 파를 할 수 있는 길이 보입니다. 파 5는 널널하다는 방심에 사고가 자주 납니다. 일단 세게 멀리 멀리 치겠다는 야심 찬 욕심과 전략 없이 홀을 공략합니다. 무작정 멀리 치자는 생각 때문에 대형사고로 이어집니다. 사실 가장 전략이 필요한 홀은 파 5입니다. 이 홀은 전략만 잘 짜면 아주 쉬운 홀인데 전략 부재의 공략 때문에 망칩니다. 500야드라고 가정할 때 최악으로 친다 해도 3번이나 4번 우드로 200야드, 5번 우드나 유틸리티로 180야드, 나머지 120야드는 짧은 아이언 거리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세 동강이를 내면 500야드는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드라이버가 대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골프에는 홀 마다 미로가 숨어 있습니다. 특히 파 3과 파 5에는 미로가 있어 이것만 찾아내면 쉽게 그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인생 곳곳에도 미로가 있죠. 아주 급한 듯한 순간, 아주 여유있는 순간 그때를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11번 홀

-클럽(채)을 다 쓸 때가 있나요.

"클럽들은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이 클럽들을 다 고르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클럽의 타면 각도가 별반 차이 안 나는 거 같지만 정확도와 거리에 막대한 지장을 줍니다. 잘못 선택하면 터무니없이 짧거나 너무 많이 비거리가 발생해 각종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우리들의 삶도 아주 작은 각도 변화에 따라 희비가 갈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설자리 앉을 자리 구분만 잘해도 인생이 편해진다고 하듯, 클럽당 비거리만 정확하게 나올 수 있게만 연습해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인생은 '각도' 같습니다."

12번 홀

-어차피 공을 홀에 넣는 게임입니다.

"골프의 최종 목적지는 그린입니다. 그것도 그린 위의 4.25인치, 즉 108mm의 원통형 구멍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합니다. 108mm가 아니라 '108 번뇌'가 있는 곳이라고. 골프에서 목표는 그린 위 108mm의 작은 구멍인데 나는 목표를 설정하지도 못한 채 수십 년을 살아왔던 겁니다. 이제 인생의 그린 위에서 버디나 파는 아니더라도 보기일 망정, 공이 홀(cup)에 떨어지는 경쾌한 소리를 듣기 위해 멋지게 마무리를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13번 홀

-'암 환자'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오진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막상 선고받았을 때는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네요.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삶을 돌이켜 보았는데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더군요. 골프공 하나도 갖고 갈 수 없는데 어이없이 세상을 살아왔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더군요. 그래서 요즘엔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가족과 주변이 달리 보이고, 제 삶이 충만해졌습니다."

14번 홀

-매번 돈 내기 하는 사람은 어때요.

"돈 내기 나쁘게 생각 안 합니다. 큰 액수 아니라 게임의 활력소를 위한 거라면 찬성 쪽이죠. 돈 내기 골프를 해보면 상대의 성품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GM의 CEO 잭 웰치는 임원을 스카우트할 때 어김없이 골프장으로 초대해서 몇 번의 라운드를 한 후 최종 결정을 한다고 했습니다. 돈을 따든 잃든 '벌거숭이 임금'이 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돈 좀 잃고 '시크릿 퍼슨(secret person)'이 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웃음)"

15번 홀

-이쯤 오니까 힘드네요.

"골프가 정말 어렵습니다. 다른 운동은 수정해서 옮기면 어느 정도 피드백이 있는데 골프는 평생 해도 제자리 아니면 퇴보하는 느낌이 듭니다. 결국 '즐거운 골프' 해야 합니다. 하루를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가치를 둬야 해요. 누구라도 '같이 걷는 게' 진짜 행복 아닙니까."

16번 홀

-요즘 제일 보람 느끼는 게 뭡니까.

"태어나 제일 잘한 게 '화랑청소년재단'을 설립한 겁니다. 미래의 리더를 찾는 정신적 유산이 중요합니다. 재단은 2006년 이곳 LA에서 창단해 올해 12살이 됐습니다. 남가주에 21개 지부, 약 1500여 명이 활동하고 있고 타주와 해외지부를 합치면 6000여 명이 지역사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앞으로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2세, 3세, 4세들에게 확고한 뿌리교육과 정체성을 전파할 겁니다."

17번 홀

-'젊은 노인(66세)'이십니다. 이제 다음 홀인 끝인데, 스코어는 몇 점 나왔나요.

"더는 숫자 씨름하지 않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어른들의 숫자 싸움을 빗대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껍데기에 불과한 숫자가 의미 있으려면 알맹이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옷이 돼야 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요즘 화랑 아이들과 지내면서 그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나중 묘비명에 쓰여있듯 '함께 즐겁게 잘 살다 간다'가 마지막 홀이 아닐까 합니다."

18번 홀

-골프 공에는 왜 움푹 들어간 자국이 많나요.

"그건 딤플(dimple)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이걸 우리 말로 보조개라곤 합니다. 이 보조개는 보통 400여 개가 있어요. 보조개는 웃을 때 생기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도 클럽으로 쳐대서 상처가 많이 납니다. 그런데 상처가 있어도 계속 웃고 있습니다. 이 딤플(보조개)이 없으면 공이 뜨질 못해요. 골프에서 인생에서, 아무리 '상처'가 있어도 '살짝 웃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멀리 날 수 있습니다."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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