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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두 얼굴의 이웃 일본


흔히 두 얼굴로 불리우는 일본. 그래서 가깝고도 먼 나라로 지칭되는 일본. 누구에게나 그들은 한결같이 친절한 웃음을 보이며 정성을 다하는 듯하지만, 역사가 주는 교훈에서 보면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고 있다. 태평양전쟁 끝 무렵, 미군은 일본군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투 중에는 전원옥쇄를 각오하고 싸우다가, 포로가 되고 나면 자기편을 철저하게 배신하는 일본군의 표변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 미 국무부의 요청으로 쓴 일본문화 보고서가 바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이다.

'국화'는 차 한 잔 마시는 데도 도(道)를 운운하는 일본인의 섬세한 미학적 세계를 상징한다. 반면 ‘칼’은 잔인하게 상대방을 살상하는 야만적 행태를 뜻한다. ‘국화와 칼’이라는 모순된 제목 속에 일본인의 이중성이 잘 함축되어 있다. 하긴 속마음(혼네)과 바깥표정(다테마에)이 다른 점은 일본인들도 자기네 특성으로 인정하는 터다. 일본인의 이중성은 미국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에 그칠지 몰라도, 어쩔 수 없이 이웃해 살아야 하는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다.

루스 베네딕트에 의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죄에 대해 괴로워하고 번민한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내 죄를 모른다 해도 양심있는 인간은 그 죄를 반성하고, 누군가에게 고백하여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한 고민하지 않는다. 수치의 문화인 일본인들에겐 죄의식이 없으며 반성도 없다는 말이다.

일본인들은 가까운 사람에게 또는 종교에서처럼 신부나 수도승에게 고백하는 관습도 없다. 그러나 일본과 같은 수치의 문화에서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에 민감하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마음을 쓴다. 자신의 죄를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런 일본인들은 남 앞에서 자신의 죄나 행동 때문에 비판을 받거나 조소를 당하거나 거부당할 때 수치를 느낀다. 이게 바로 일본인들이 느끼는 치욕이다. 그리고 이들이 모욕감이나 치욕을 느낄 때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보복한다.



일본인들은 사과를 잘한다. 툭하면 ‘스미마셍’을 남발한다. 그러나 죄의식 없고 반성없는 그들은 사과하고도 전혀 행동에 변화가 없다. 일본인들은 스스로도 상대방의 사과가 진심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넘어간다.

왜냐하면 자기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쟁범죄나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루스 베네딕트의 말처럼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수치의 문화인 일본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전세계의 비판이 쏟아져 수치심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수치를 아는 사람은 자살하거나 복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에게 변명은 있어도 잘못의 인정은 없다.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이라는 영화는 일본인의 내면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라쇼몽> 은 어느 무사 부부가 숲 속을 지나가다가 도적을 만나 변을 당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때 도적은 무사를 나무에 묶어놓고 그 앞에서 그의 아내를 겁탈한다. 그리고 무사까지 살해한다. 때마침 그 장면을 나무 뒤에 숨어서 본 나무꾼이 신고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런데 정작 진술 과정에서 실제 범인은 없다. 살해당한 사람은 무사가 확실한 데,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진술 과정에서 혐의자들은 모두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은 끝내 미궁에 빠져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구로사와 감독은 라쇼몽〉의 주제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허식 없이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 시나리오는 그런 허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렸다. 아니, 죽어서까지 허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뿌리 깊은 죄를 그렸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업이고, 인간의 구제하기 힘든 성질이며, 이기심이 펼치는 기괴한 이야기다. 여기에는 일본인의 비양심적인 일면이 드러나는 미궁과도 같은 심리가 내포되어 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하여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일'이 그것이다. 현재 일본의 아베 총리가 ‘위안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속성 중의 하나라고 봐야 한다. 분명히 피해자는 있는데, 그들은 가해자가 없다고 발뺌을 하려고 드는 것이다.

우리에겐 이런 일본이 지리적으로 이웃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행이요 불운이다. 일본인들은 주변 모두가 자기 기준에 맞을 때만 편안하고 쾌활하다는 루스 베네딕트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이 항복하고 일본열도에 진주한 맥아더와 미군들이 놀란 것은 미군에 협조하는 고분고분하고 친절한 일본인들과 난징에서 악마적인 학살 만행과 전쟁 광기를 보이던 일본인들이 동일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착하다는 대다수 일본인들은 독도 영유권이나 역사왜곡에 집단으로 침묵하며, 일본이라는 국가의 잘못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침묵하니 자신도 침묵하는 것이다. 죄책감 없는 일본인들은 절대 잘못의 인정이 없으며, 진심어린 사과가 없다는 사실과 일본에게 사과와 보상을 받으려면 미국 중국처럼 오직 힘으로 눌러야한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들의 웃는 얼굴에 또 속아 넘어간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렇게 말했다. “칼은 국화와 함께 일본의 한 부분이다. 당연히 모순이지만 이 또한 진실이다. 일본의 행동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에서 자기위치를 구하리라. 그렇지 않게 되면 무장된 진영으로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일본은 ‘한국에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그들 속마음엔 ‘사과’가 없다. 일본은 한국을 만만하게 본다. 이게 한·일 관계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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