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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맛과 멋] 옹기의 철학

이영주 / 수필가

30년 만에 집을 옮기게 되니 정리할 물건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 중 하나가 도자기와 항아리들이다. 워낙 도자기를 좋아해서 한국에 있을 때 백자를 산 게 소품들까지 여러 개 된다. 김기철 선생의 작품들도 적지 않고, 윤광조 작가의 분청사기도 몇 점 있다. 좋아하는 항아리는 리빙룸에 전시(?)했던 새우젓독을 비롯해 인간문화재 김복동 할아버지 부엌용 소품들까지 꽤 된다. 그들이 놓일 자리에 놓여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정리하려 드니 자잘한 소품들까지 너무 많다. 다행히도 막내네 집이 넓어서 대부분을 막내가 가져가기로 했다.

그런데 막내가 정작 욕심낸 것은 부엌의 쌀독으로 쓰고 있는 큰 항아리와 김복동 할아버지의 작은 단지들이었다. 나처럼 옹기를 좋아하는 막내는 한국에 갔을 때 경상도의 유명한 옹기점을 찾아가 작은 장독 정도의 중간 크기 항아리들을 3개나 사서 살고 있는 몬태나로 부쳤다고 국제전화까지 걸며 자랑했다. 그 중 한 개가 운송 중에 깨져서 마치 자식이라도 잃은 것처럼 애통해하던 모습이라니. 사실 내가 좋아하는 것도 옹기가 으뜸이다. 값비싼 도자기들보다 수수한 옹기가 더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엄마의 숨결처럼 다정하다.

생활 구석구석에서 애용됐던 우리 고유의 옹기는 사전적 해석으로는 '질그릇'과 '오지 그릇'을 총칭하는 말이다. 신석기 시대 이후 삼국시대 이전부터 장류나 술, 곡식 등의 저장고로 옹기가 사용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옹기를 만드는 진흙은 공기를 빨아들이고 습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등 숨을 쉰다. 더군다나 가마 안에서 구울 때 생긴 검은 연기가 옹기에 박혀 방부제 역할까지 한다니 발효음식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저장용기는 없다.

정작 감동적인 대목은 옹기가 흙으로 돌아가는 그릇이라는 점이다. 옹기는 산에서 채취한 찰흙으로 빚어 부엽토와 재와 물을 섞은 잿물 유약을 발라 굽는다. 그러므로 인체에 전혀 해롭지 않고, 조심해서 사용하면 천년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파손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깨어진 옹기는 땅에 묻히면 그대로 다시 흙이 된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보니 옛 유물을 발굴했을 때 도자기가 나왔다는 소식은 들었어도 옹기가 발굴됐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자기의 역할이 끝났을 때 다시 자연으로 토화(土化)되는 옹기의 일생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같은 우리 인생사와 어쩜 이리 닮았을까.



결혼 후 끼니를 준비할 때마다 장독대를 오르내리곤 했다. 된장이든 고추장이든 깨끗이 떠와야지 조금이라도 장독 벽에 묻혔다가는 시어머니께 혼이 났다. 매일 새벽마다 장독대를 깨끗이 닦는 것도 내 몫이었다. 겨울에도 물청소를 하니 손등 트는 일이 다반사였다. 핸드크림이 없던 시절이라 약국에서 글리세린을 사다가 바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튼 손등이 얼마나 쓰라렸는지 모른다. 요즘은 겨울날 시린 손을 호호 불며 했던 그 장독대 청소마저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더군다나 그 장독들에 무한한 애정이 끓어오르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전체적으로 둥글면서 배보다 어깨가 더 튀어나와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자태가 풍만한 여인처럼 뇌쇄적인 전라도 '달 항아리', 일조량이 짧아 해를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 입이 넓고 왜소한 강원도, 누가 양반 아니랄까봐 목이 높은 충청도, 배가 불룩하게 쳐져 있고 바닥이 입보다 좁은 뚱순이 경상도, 물을 길을 때 사용하는 주둥이가 좁은 제주도의 '물 허벅' 등, 옹기는 그 지방의 기후와 용도에 따라 생김새가 사람들만큼이나 5대양 6대주처럼 특색이 다르다. 그저 단순한 생활집기로 생각했던 옹기에도 이렇게 지혜로운 과학이 존재한다.

옹기의 소박한 덕성을 단단히 마음 속에 저장해뒀다. 옹기들을 떠나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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