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시로 읽는 삶] 늙은 호박

조성자 / 시인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했네/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 속 가득 차 있을 씨앗/ 가족사진 한 장 찍어 본 적 없어/ 호박네 마을 벌소리 붕붕/ 후드득 빗소리 들려/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본 밤/ 호박은 방안 가득 넝쿨을 뻗고

- 함민복시인의 '호박' 부분



제법 큰, 한 아름은 되는, 앉은자리가 넓은 호박을 만져본다. 누렇게 익은 호박을 늙은 호박이라고 부르다가, 잘 익은 것이 늙음인가 하다가, 늙으면 잘 익었다는 것인가 묻다가, 장석주시인의 '대추 한 알'이란 시를 떠올린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

내면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되는 호박을 만져보다가 왜 자꾸 애호박이었을 적의 웃음을, 당참과 명랑함을 떠 올리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호박도 내부에 태풍과 천둥과 벼락이 들어 있을 터인데 태풍과 천둥과 벼락을 제압한 것인지 수용한 것인지 다는 모르겠으나 수많은 외풍과의 동행 혹은 결전을 무난히 견뎌가며 풍요롭게 늙을 수 있었던 것은 애호박이었을 적의 명랑한 기질 때문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대책 없던 희망, 무모하리만치 높기만 하던 목표들 배후에 명랑함이 있다. 명랑함은 긍정성 전반이 아우르는 힘이다. 삶의 성장판(成長板)을 키워주던 에너지다.

면마다 다른 빛을 내는 보석처럼, 재잘거리고 반짝이는, 때론 아슬아슬 위험하기도 한 명랑성은 삶을 공격하는 어둠과 맞서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며 어떤 존재를 만들어 가는 동력이 된다. 잘 익은 것들은 둥글다. 둥글어진다는 것은 익어간다는 말과도 같다. 둥글어지려는 유연한 관성이야말로 삶을 지속시키는 방편이기도 하다.

잘 익은 것들은 당도를 함유한다. 당도는 질을 결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좋은 과일이란 일정이상의 당도를 함유해야 한다. 그런데 당도를 만들어 내는 건 세찬 것들이다. 땡볕 같은, 무서리 같은, 막막했던 순간들을 견디고 능히 통과 해야만 한다. 삶의 묘미다.

호박은 이 가을을 향해 전력질주 했을 것이다. 전력질주의 동력은 애호박일 때 가졌던 무구한 발랄함이었을 것이다. 어떤 시인은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잘 익어가는 것은 뭔가의 조련을 받는다. 삶을 단련시키는 방법은 저마다 다 다를 것이지만 외풍을 막아내는 명랑한 기질이 있어 흔들리면서도 내성은 강해지고 구력이 쌓인다. 명랑함은 쇄빙선의 앞머리처럼 강력하게 밀고 가는 추진력의 일부이기도 하다.

내 안에서 자꾸 명랑함이 사라진다. 가을이 왔기 때문인가. 아님 가을이 왔음을 의식하고 세로토닌이 스스로 자포자기에 이른 것인가. 기질적 우울감을 밀어내려는 안간힘도 명랑함의 부추김이 없이는 소용이 없다.

잘 익은 것은 바라만 보아도 푸근하다. 누군가에게 가까이만 있어도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사람이라면 그는 잘 살아온 것일 게다. 침묵이 맑은 사람이라면 그는 적게나마 경쾌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밝음과 어둠에 균형 있게 대처할 줄 안다면 외적 모습이 어떠하더라도 가치가 폄하되지는 않는다.

호박을 한 덩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수한 여럿이 모여서 된 하나이기 때문이리라. 무수한 어둠, 무수한 밝음이 상호작용을 해서 만들어 낸 이 가을의 풍광들. 소멸을 향한 것일지라도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해 늙어가는 존재는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큰 호박을 늙은 호박이라고 굳이 불러보는 이유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