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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의 영웅을 만나다…맥아더 기념관(MacArthur Center)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의 이상호 박사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가 한국전쟁에서 이룬 최고의 업적이다. 작전의 성공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비로소 유엔군이 낙동강의 북한군 전선을 무너뜨릴 수 있었고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병참시설을 확보해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었다."

인천 상륙작전은 많은 미군의 생명을 구하고 맥아더의 명예를 최고로 높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작전 이후에는 중공군 개입에 대해 오판을 했고 1950년 겨울에 대참패했다.

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한국전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맥아더는 중국이 설령 참전한다 해도 미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오히려 맥아더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면 '역사상 최대의 참사'가 벌어질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진격했다.



그는 일선의 지휘관들의 정보를 무시했다. 오히려 진격을 독려해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려 총공세를 명령했고 준비하고 있던 중공군에 포위됐다.

1951년 1월 말에 시작된 중공군의 포위 대공세로 미군은 역사적인 대참패를 당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미 8군과 10군단의 선봉대는 단숨에 궤멸됐고 결국 미군은 청천강에서 후퇴해 전열을 재정비했다. 중공군이 개입하자 맥아더는 만주에 항공폭격 허가를 본국에 요청했다. 원자폭탄 투하를 주장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에 참전 빌미를 줘 3차 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우려해 불허했다. 조기에 전쟁을 종결지으려는 트루먼 대통령과 의견차로 결국 맥아더는 해임됐다 . 한국전쟁은 미국 국내에서 인기없는 전쟁이었다.전쟁 기간이 길어지자 여론의 종전 압력도 커졌다. 이로 인해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그리고 지금은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맥아더는 해임 후 귀국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명연설을 하고 사라졌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전쟁 영웅이다. 맥아더의 아버지도 스페인, 필리핀 전쟁에 참전한 3성 장군이었다. 부친의 영향으로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하고 아들의 뒷바라지를 한 어머니 하디 맥아더 여사의 헌신이 수석졸업의 비결로 알려져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맥아더는 고향인 아칸소주 리틀록이 아니라 어머니 고향인 버지니아주 노폭에 기념품 및 자료 등을 기증했다. 노폭 맥아더 기념관에는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의 군사 업적과 여러 유물이 전시돼 있다. 메달, 유니폼, 군사 모자, 파이프 등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20분 길이의 다큐멘터리 영화도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 중앙에 맥아더 장군과 그의 아내 진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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