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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차별의 아픈 역사… 민권 운동의 성지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앨라배마 버밍엄(Birmingham)

앨라배마 주 중북부에 위치한 버밍엄 시는 남부지방의 주요 공업 중심지다. 제퍼슨·셸비·워커 카운티와 베서머·페어필드 시 등 주변 지역들을 포함하는 대도시권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은 1813년에 정착이 시작되었고 1870년 동서남북 사방으로 철도가 교차하게 되면서 급성장하게 됐다. 1871년에는 영국 버밍엄의 이름을 따서 버밍엄 시를 설립했다. 지금은 철강업이 쇠퇴했지만 버밍엄은 제철에 필수적인 석탄, 석회석, 백운석, 철광석 등이 풍부해 남부의 철강 중심지로 발전했다.

버밍엄은 남부에서도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남북전쟁으로 노예 제도가 폐지됐지만 남부지역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여전했다. 사실상 흑백 분리 제도가 시행 중이었다. 유색인종은 백인 전용식당에 들어갈 수 없을 뿐더러 백인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고 모든 공공시설도 유색인용이 따로 존재했다. 흑인에게는 일자리가 제공되지 않아 임금이 낮은 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백인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했다. 경찰에 체포된 파크스로부터 시작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 민권운동의 시발점이 됐고 이후 흑인 민권운동은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버밍엄시는 60년대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경찰의 3분의 1이 KKK 소속이었고 인종관련 범죄가 빈번한 곳이었다. 1962년 경찰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하는 비폭력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하지만 비폭력시위는 계속 이어졌고 버밍엄시는 혼란에 빠졌다.

1963년 9월 15일 버밍엄 16번가 침례교회에 대한 KKK의 폭발물 테러로 4명의 흑인소녀가 목숨을 잃었다. 16번가 침례교회는 버밍엄 최초의 흑인 교회로 테러 사건 전부터 흑인 민권 운동가들의 주요 회합장소였다. 버밍엄에서 벌어졌던 민권운동 행진 등은 대부분 이 교회에서 시작됐다.

테러 사건은 미국 남부 증오범죄의 상징이 됐고 이후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선거권법을 포함한 법률을 제정하기 위한 민권운동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버밍엄 시 정부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인종 분리 시설 완화와 흑인인력 고용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협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반대와 폭력이 심해지자 연방정부가 주 정부에 대하여 압력을 가했다.

1963년 6월 케네디 대통령은 남부의 인종분리정책이 부도덕하고 잘못됐다는 것을 시인하고 흑인 민권에 대한 제안을 발표했다. 1963년은 흑인 민권운동의 중요한 해가 됐다. 버밍엄시의 합의문 발표 이후 식당과 공원 등 공공시설에서 흑백차별이 일소됐다.

물대포와 체포 구금에 맞서 평화적 시위를 한 끝에 얻은 값진 결과였다. 버밍엄 흑인민권운동을 주도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플로리다, 미시시피 등 타지역에서도 민권운동을 성공적으로 펼쳤나갔다. 이 공로로 64년 12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앨라배마주 버밍햄은 흑인민권운동의 성지다.

16번가 침례교회를 테러한 범인들은 좀처럼 잡히지 않다가 1977년, 2001년, 2002년 붙잡혀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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