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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은 스스로 정립하는 것"

흑인 가정서 자란 한인 입양인
윌슨씨의 남다른 성장 스토리
전기 '투 머치 소울' 발간

미국 남부에서도 가장 ‘검고 깊다’는 미시시피. 50개 주 중 흑인 비율은 가장 높지만, 흑인의 지위는 가장 낮고, 비만율은 가장 높지만, 평균 소득은 가장 낮다.

1970년대 이곳의 흑인 가정으로 입양되어 8년 전 애틀랜타로 이사 오기 전까지 다른 한인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신디 윌슨 씨. 그는 최근 자신의 독특한 성장 스토리와 인종 문제에 대한 생각, 어른이 되어서야 찾게 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투 머치 소울(Too Much Soul)’이라는 전기에 풀어냈다.

윌슨 씨는 흑인 어머니 손에 성장했다. 부모님은 몇 번의 유산 끝에 서울에서 태어난 윌슨 씨를 입양했다. 어머니는 얼마 뒤 남자아이를 출산했지만, 남편과 결별하고 남매를 홀로 키웠다.

육군 예비역 장교 출신인 어머니는 무척 엄격하고 독단적인 방법으로 윌슨 씨를 훈육했고, 그에게 씻기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덕분에 지금은 어머니와 연락이 거의 끊긴 상태다.



하지만 백인 헤게모니의 미시시피 사회에서 흑인이자 미혼모인 약자로서의 동질감 덕분일까, 윌슨 씨는 “내가 아시안이라 가족 안에서도 겉도는 듯한 기분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성인이 되어 만난 많은 입양인은 아직도 어울림에 대한 갈망과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필생의 과제처럼 ‘뿌리’를 찾으려 하더라. 솔직히 놀랐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어딜 가나 미운 오리 새끼처럼 튀었고, 괴롭힘을 당했다. 그는 “내가 워낙 외향적이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싸움도 많이 했다”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나는 아이로 소문이 났다. 남동생을 괴롭히는 아이들도 나를 보면 벌벌 떨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춘기 들어서는 그에게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윌슨 씨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어머니는 미시시피 주도 잭슨의 흑인 지역에서 백인들이 꽤 있는 교외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윌슨 씨가 기죽지 않도록 겉은 멀쩡해 보이는 벤츠를 사서 매일 학교에 데려다줬다. 윌슨 씨는 “제발 학교 앞에서 차가 멈춰서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했었다”고 회상했다.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마치 인종적 자기장의 영향을 받는 쇳가루처럼 백인, 흑인 집단으로 나뉘었다. 두 명의 중국계 학생들에게는 이질감을 느꼈던 윌슨 씨는 흑인과 백인 친구들 사이의 경계 어디 즈음을 차지했다.

그는 “처음으로 사귀게 된 백인 친구들에게서는 집이나 흑인 친구들에게 느끼지 못했던 어떤 자유를 경험했다. 백인 아이들은 자신의 외형적 모습을 당당하게 받아들였고, 부모들은 아이들이 내키는 대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허용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백인 친구들과 어울리면 흑인 친구들과 멀어진 듯했고, 반대로 흑인 친구들과 어울리면 백인 친구들과 멀어진 듯 느껴졌다. 백인 친구와 태닝을 하러 간다는 윌슨 씨에게 어머니는 꼭 “조심해, 백인들은 믿을 수 없어”라는 말을 던졌다.

그러곤 얼마 뒤, 어머니의 말을 증명하는 듯한 일이 터졌다. 백인 절친이 다른 친구들에게 “신디는 자기가 흑인인 줄 아나 봐”라고 말했다는 것을 흑인 친구에게 전해 들은 것이다.

윌슨 씨는 “내 존재를 통째로 부정당한 것처럼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분노를 느꼈다. 내 가정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친구였기 때문에 더욱 억울했고, 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이 친구를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려 했지만, 흑인 선생님이 그를 말렸다. "백인 아이와 흑인 가정의 아시안 아이가 싸우면 주먹다짐의 승리와는 무관하게 누가 진짜 이길지는 분명한 상황인 것을 그때 본능적으로 알게 됐다.”

이즈음 어머니는 창의적일 망정 독단적인 방법으로 윌슨 씨의 정체성 고민을 틀어막았다. 입양한 딸이 흑인과 백인 사이 묘한 경계 지역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사실은 자신이 신디의 친모라고 거짓으로 고백한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입양아라고만 생각했던 신디 씨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실제로 약간의 위로이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는 한국에 주둔했을 때 어떤 남자를 만났었다는 이야기를 꾸며냈고, 나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 실제로 엄마와 나는 아몬드같이 생긴 눈이나 넓적한 코가 닮았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진실을 고백한 것은 이미 둘의 사이가 틀어졌던 15년 뒤였다. 윌슨 씨가 20대 후반이었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뜬금없는 연락이 왔다. 윌슨 씨는 “어머니는 교회에 헌 옷을 기부 해야 하니 좀 데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교회 도착하니 목사님이 마치 알고 있다는 듯 우리 둘을 반겼다”고 말했다. 목사와의 ‘상담’을 가장한 자리에서 어머니는 윌슨 씨에게 폭탄을 던졌다.

“신디야, 나는 네 친모가 아니란다.” 윌슨 씨는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세상이 뿌리째 뽑힌 것 같았다. 생애 그렇게 과격하게 울어보기는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그 뒤로 어머니와의 관계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신디 씨는 얼마 뒤 앨라배마 버밍햄을 거쳐 8년 전에는 애틀랜타로 이사를 왔고, 처음으로 다른 한인, 그리고 입양인들과 교류하며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2016년에는 “미국 사회가 인종적으로 더욱 분열되는 것을 보고 내 이야기를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그는 DNA 검사를 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글을 쓰며 “‘유전적 여행’을 떠나게 됐다”고 말했다. 검사 결과 70% 한국인, 나머지도 중국이나 일본 같은 동아시아인이었다. 작년 여름에는 남동생과 한국으로 여행도 떠났다.

그는 유전적 인종 구획에 따라 스스로를 박스에 가두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미국 흑인 문화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나 자신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미국인들은 더 이상 인종적으로 1차원적이지 않다. 삶에서 경험한 문화적 영향을 고려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할 권리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조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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