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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수 칼럼] ‘차도백’

오늘 새벽에 한국에서 형의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형은 나보다 나이가 한 두어 살 위였지만 같은 동기생이라 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형 생전에 이런 말 한 일 없지만, 형은 늘 내게는 친형 같은 존재였습니다. 고등학교 동기생들은 형을 차도백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지요. 형이 학교 대표 육상선수로 여러 대회에 우승해서 그 당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네 개나 딴 체코의 육상 영웅 자토펙(Zatopek) 같다고 해서 형의 성 차(車)를 넣고 “체코에는 자토펙, 제고에는 차도백” 했지요. 인간의 인연이 부평초와 물이 서로 만나듯 우연하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고 하지만 이렇게 졸지에 가다니 슬프고 야속하여 무슨 말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은 스포츠에 천부의 재능을 타고났지요. 육상의 달리기, 기계체조, 역도, 권투 이 모두에 발군의 기량을 지니고 있었고 대외 시합에서 학교를 대표하기도 했습니다. 뿐만이 아니지요. 형은 1 대 1 ‘놓고치기 맞짱’(맨손 싸움)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형의 싸움 실력은 그 당시 인천에 있는 고등학교를 통틀어 형을 당할 적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연유에서 형이 그런 명성을 얻었는지는 모릅니다. 형이 맞짱 뜨는 것을 직접 본 일도 없습니다. 한때 형이 상급생들에게 다구리(몰매)를 맞을 상황에서 번개 같은 몸놀림과 싸움 실력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것을 본 일은 있습니다. 그 얘기를 해야겠네요.

형은 애초에 우리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한 해 선배였습니다. 중학교 때 가정 형편상 1년을 쉬고 복학하여 우리와 같은 학년이 되었지요. 복학 후 형이 옛 동기생들에게 전처럼 반말을 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고 그중 10여 명이 작당하여 버릇을 가르친다고 형을 에워싸고 시비를 건 일이 있었습니다. 형 앞에 있던 학생이 주먹을 날리자 앞에 있던 몇 명을 단숨에 때려눕히고 비호같이 포위망을 탈출하는 것을 멀찌감치에서 보았습니다. 형은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던 사실을 모릅니다.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나는 동양 천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는 싸움의 달인 시라소니가 연상됩니다. 뛰어난 싸움 실력을 갖춘 형은 조금은 불편했을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젠체하거나 싸움질하고 다니는 일이 없었습니다. 형은 심성이 착하고 행실이 바른 모범생이었습니다. 형이 전교 규율부장으로 뽑힌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동기생들이 형을 향해 가졌던 존경과 신뢰를 알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형과 내가 가까워졌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을 시작으로 의기투합했던 것 아닌가 여겨집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이라고 해서 우리 집 이층 다다미방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하던 일이 있었지요. 새벽에 잠깐 잠에 빠져버린 나는 형이 슬그머니 나를 깨우지 않고 빠져나간 것도 몰랐지요. 친구에게 아침도 먹여 보내지 않았다고 어머님이 꾸중하신 일도 생각나네요. 김포 비행장에 근무하며 근처에서 셋방살이하던 때 우리 딸 첫돌을 기억하고 비포장 먼지 길을 찾아 금반지를 선물로 건네주고 간 일도 있었지요. 그 후 형은 학훈 1기 장교로 월남전에 참전했고 서로 간 소통이 끊어졌습니다. 형의 소재나 안부도 모른 채 뒤늦게 다시 공부한다고 미국행을 했으니 그 후 형과는 마치 남처럼 떨어져 많은 해를 낭비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형이 갑작스레 떠나시니 1980년대 잠시 귀국했던 나를 배웅하러 김포비행장에 나와준 형을 본 것이 형과의 마지막이 되어버렸네요.



생전에 형에게 이런 말 한 일은 없지만 나는 형의 마초 기질을 좋아하고 일종의 경외감마저 가졌었지요. 나 자신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형은 내가 은근히 선망하는 인간상이었습니다. 형을 생각하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얼터 이고(alter ego: 또 다른 자아)가 떠오릅니다. 형은 내가 아닌 나, 나와는 다른 별개의 나, 그러나 내가 꿈꾸고, 열망하고, 동경하는 나였습니다. 형은 내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나의 분신입니다. 형의 명복을 빕니다. 가는 길이 평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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