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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데이 특집] 킹 목사 고향 '스위트 어번'을 가다

커뮤니티가 킹 목사 리더십 일깨웠다
민권운동가 다수 배출한 흑인들의 마음속 고향
자유 얻었지만 스스로 고립돼 결국 쇠락

흑인을 대표하는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 그의 고향이 애틀랜타라는 사실은 유명하지만, 그를 배출한 커뮤니티가 어딘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때 '흑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불리는 '스위트 어번'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마틴 루터 킹 센터 관계자들은 "스위트 어번의 흑인 커뮤니티를 이해하지 않고는 킹 목사를 이해할수 없다"고 공언한다.

애틀랜타에 살면서도 잘 몰랐던 킹 목사의 고향 '스위트 어번'에 대해 알아본다.



▶인종폭동 계기로 탄생=1865년, 남북전쟁이 남군의 패배로 끝났다. 흑인 노예들은 자유를 찾았지만 일자리는 없었다. 해방된 흑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애틀랜타로 몰려갔고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경제력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0년을 전후로 유럽계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저임금 노동력 일자리를 놓고 흑백 노동자들이 일자리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애틀랜타 백인들 사이에서도 흑인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됐다. 그리고 1906년 9월 22일, '백인 여성이 흑인 남성에게 윤간당했다'라는 신문기사를 계기로 백인 남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1만여명의 백인들은 애틀랜타 한복판에서 흑인들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휘둘렀고, 흑인 27명이 사망했다. 정작 폭동을 유발한 신문기사는 나중에 허위보도로 밝혀졌다.

인종차별과 폭동으로 상처입은 흑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달랬고, 흑인상권이 형성된 어번 대로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애틀랜타 흑인 커뮤니티 '스위트 어번'의 탄생이었다.

▶도시 안의 도시=스위트 어번은 인종차별이 만들어낸 흑인들의 '유토피아'였다. 의사·사업가 등의 고소득부터 일용직 노동자, 식당 웨이터들까지 각계 각층의 흑인들이 작은 공간에 몰려 살았다.

인종차별을 겪던 흑인들은 "밖(백인사회)에서 벌고 안(스위트 어번)에서 쓴다"는 일종의 보호경제체제를 구축했다. 또 각종 경제단체나 사교단체를 만들어 흑인 상권 보호에 나섰다. 이같은 노력으로 이 지역은 전 세계 흑인이 모여사는 어떤 곳보다 번창했고, 그래서 '스위트' 어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스위트 어번이 한창 번창하던 1929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출생했다. 스위트 어번 경계선에 위치한 킹 목사 집의 뒷마당 뒷쪽부터는 저소득층 백인 지역이었다. 어린 킹은 흑인 커뮤니티에 살면서도 이웃에 살던 백인 저소득층 노동자들의 아들딸들과 놀면서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깨닫기도 했다.

▶커뮤니티가 만든 영웅=킹 목사는 애틀랜타 커뮤니티가 전략적으로 키워낸 지도자였다. 먼저 그의 집안부터가 흑인 엘리트 집안이었다.

당시 미국의 평균 고등학교 졸업률은 약 25%, 대학 졸업률은 약 5% 수준이었다. 그러나 킹 목사 가정은 성인들 모두가 대학교육을 받았다. 킹 목사의 외할아버지 A.D. 윌리엄스 목사는 흑인 커뮤니티의 저명한 지도자였다.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는 10대에 홀홀단신 애틀랜타로 상경해 야간학교를 통해 졸업하고 목사가 된 인물로, 그의 교회는 스위트 어번의 중심지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회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그의 집에는 애틀랜타 시장 등 지역 정재계 인사들의 왕래도 잦았다. 자연히 어린 킹 목사도 정치와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킹 목사의 민권운동은 먼저 '스위트 어번'의 흑인상권 보호에서 시작됐다. "우리는 흑인 비즈니스, 은행, 보험사 등 흑인 주도 비즈니스에 힘을 보태야 한다"며 "억압에 맞서기 위한 진정한 힘은 경제력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종차별적 행위를 일삼은 대기업에게도 집단적 저항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애틀랜타에 본사를 둔 대기업인 코카콜라에 대해 "인종차별적 고용정책을 펼치는 코카콜라를 마시지 말자"며 불매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스위트 어번의 쇠락=1968년 킹 목사는 테네시의 한 모텔에서 암살된다. 그러나 킹 목사가 향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즈음, 그를 키워낸 '스위트 어번'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킹 목사가 주도한 흑인 민권운동의 성과로 거주지 선택이 자유로워지자, 부유한 흑인들은 더 이상 좁고 불쾌한 '스위트 어번'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자본과 기술을 가진 흑인들은 애틀랜타 북쪽의 부촌이나 교외로 이사를 떠나버렸다.

'스위트 어번'에는 갈곳이 없던 가난한 이들만 남겨졌고, 곧 가난과 범죄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킹 목사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의 아이러니다.

오늘날 스위트 어번은 킹 목사의 생가를 중심으로 '킹 센터'가 세워져 역사적 장소로만 남아있다.

애틀랜타 흑인사회 지도자들은 스위트 어번의 흥망성쇠가 한인을 비롯한 소수민족 커뮤니티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강조한다. 킹 목사의 비서였던 제노나 클레이턴 트럼펫 어워드 이사장은 "이제 한인 커뮤니티도 자유와 고립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그는 애틀랜타 흑인 커뮤니티에 대해 "같은 민족, 같은 혈통끼리는 부인할 수 없는 유대감이 있다. 하지만 이 유대감에 안주해 스스로를 격리 시키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회상한다.

"준비되지 않은 자유는 스위트 어번에게 '양날의 검'이었다. 흑인들에게 자유가 주어지자 모두가 스위트 어번을 떠났다. 킹 목사도 자신이 투쟁해 얻은 자유로 커뮤니티가 몰락하는 모습을 보며 괴로워했다"고 회상했다.

클레이턴 이사장은 "한인들도 미국의 자유를 동경해 이민왔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앞으로 한인들이 미국에서 어떤 한인 커뮤니티를 만들어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커뮤니티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그 안에 고립시키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조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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