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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팬덤’이라는 세계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말을 입에 자주 담는 이들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편파적으로 고르는 것 같다. 일제강점기를 두고 저 말을 쓰는 경우는 흔한데, 6·25 전쟁을 두고 그러는 예는 별로 본 기억이 없다.

아마 수학을 잊은 민족의 미래도 밝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내 앞에서 수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의 미래를 위해’라고 말한다면 좀 으스스한 기분이 들 것 같다.

나는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민족의 번영보다는 내가 속한 시공간을 알고, 인간 세계를 움직이는 거시적 힘을 이해하고, 균형 잡힌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고, 반성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려 한다. 우리가 앞으로 세계인들과 함께 헤쳐가야 할 미래에 민족이 얼마나 유의미한 정치적 단위일지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앞으로 수십 년 사이에 그 개념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민족이 통합과 혁신의 주체로 힘을 발휘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지난 시대에 많이 썼던 ‘자랑스러운 단일 민족’이라는 표현을 최근에 들어본 적이 있는지. 민족은 이제 분쟁·갈등과 자주 엮이는 단어가 됐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정치 단위는 무엇이고, 그 단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미래 세대에게 필요한 교육은 뭘까.

나는 과감하게, 지금 제일 유심히 살펴야 할 정치사회 세력이 팬덤이라고 말해 본다. 이제는 더 이상 흥미로운 현상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같고, 특정 진영만의 일도, 한국만의 문제도 아닌 듯하다. 인터넷·소셜미디어에 힘입어 여론과 사회를 흔드는 거대한 힘과 구조가 새로 등장한 것 아닐까? 지금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진행 중인 것 아닐까?

지금의 정치 팬덤은 ‘3김 시대’의 열성 지지자들과는 다르다. 그 시절의 유력 정치인들은 자신의 선택을 지지자들이 따르도록 이끌 수 있었다. 지금은 선거 때건 아니건, 늘 총력전 태세인 팬덤이 정치인 중에서 자신들의 스피커를 고른다. 팬덤의 중심부에 있는 인물들은 대체 가능하며, 외려 정치인들이 팬덤의 간택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다. 그 와중에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다기보다는 의회제도가 무력해진다.

팬덤은 매체이기도 하다. 팬들은 서로 끈끈하게 소통하면서 팬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불행히도 이는 ‘고결한 우리 대(對) 부패한 박해자들’이라는 잘못된 세계관을 낳기 쉬운 것 같다. 게다가 이런 세계관은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면서, 나를 특별한 존재로―더 옳고, 더 깨어 있고, 더 사명을 지닌 존재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기묘한 자아도취 속에서 세계는 늘 성전(聖戰) 중이다. 한 발도 물러나서는 안 되는데, 논리나 행동의 일관성 따위가 뭐 대수로운 문제랴.

나는 여전히 자기 성찰을 하는 팬덤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우리가 불평등이나 기후변화 같은 지구적인 규모의 과제들을 해결하려면 팬덤의 순발력이나 수평적 연대 같은 장점이 꼭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학·사회학 뿐 아니라 기술 분야까지 다양한 학제간 연구가 펼쳐지면 좋겠다. ‘포스트 코로나’보다 ‘포스트 팬덤’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팬덤 세계관이 코로나바이러스보다 사회 전체에 더 심오한 영향을, 더 오래 미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돌고 돌아 교육 이야기를 하자면 팬덤 시대를 헤쳐갈 미래 세대에게 과학과 경제학 교육을 강화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들이 어떤 팬덤에 참여하든, 무엇보다 현실(팩트)을 중시하고, 건강한 회의주의를 습관처럼 몸에 지니고, 세상에 도덕 만능주의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넘쳐 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력한 민간 처방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이상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장강명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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