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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방 연대기

“지난 인생과 함께 해온
수많은 나의 가방들
언제가 될지 모르나
아무 가방도 소용 없는
그런 여행이 남아있다"

생일 선물로 명품 핸드백을 받았다. 가방 중앙에 로고가 번쩍이고 있는 모양이 낯설어 옷장에 넣아 두었다. 선뜻 그 가방을 들지 않음을 알아챈 딸이 해결방안을 제시해 주었다. 로고를 떼고 사용하라고. 명품을 선호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하나쯤은 제 엄마의 어깨에서 빛날 가방을 꿈꾸었던 같다.

요즘 들고 다니는 가방은 헝겊으로 만든 수제품이다. 오십견을 앓고 난 후여서 가벼워서 좋다. 세척이 가능하여 실용적인 면에서 손색이 없다. 깨끗이 빨아 건조기에서 꺼낼 때 보송보송한 감촉은 유년 시절 비에 젖은 운동화를 연탄불에 말려 신을 때와 유사한 상쾌하고 안온한 기분이 듣다.

무궁화 꽃을 보며 불현듯 가방 속에 담겨 있었던 지난날의 회상들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입학 후 메고 다니던 무궁화 문양의 가방. 가죽 냄새가 빠지지 않아 대청에 놓아두라고 당부하셨건만 살짝 갖고 들어와 연필과 지우개가 나란히 담겨진 필통과 공책을 넣었다 뺐다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눈만 뜨면 툇마루 댓돌에 가지런히 놓인 빨간 운동화를 신고, 가방을 메고 뜨락을 몇 번씩 돌며 입학 예행 연습을 했다. 어떤 계집아이가 짝궁이 될까?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기다림으로 차있던 봄날. 사물에 대한 동경의 눈빛으로 가득했던 1학년 4반 교실 풍경은 지금도 가끔 나의 창가에서 어른거린다.



교정이 아름다운 중학교에 갔다. 소녀들의 마음도, 개나리 숲도, 봄바람에 살랑이며 온통 노란빛이다. 그때 책가방은 짐가방이다. 두터워진 교과서, 미술, 수예, 재봉, 체육, 그리고 붓글씨가 있는 날에는 먹과 벼루까지 챙겨야 했지만 다른 것은 빌려 써도, 돌아가면서 읽던 책 ‘빨간 머리 앤’은 반드시 지참해야 했다. 비오는 날에는 우산까지 받쳐들어야 하니 어느새 우리 어깨 한쪽이 기울어져 있었다.

고등학교 때에 가끔 남산 도서관에 다녔다. 참고서로 가방은 더 무게가 가중된다. 외국에선 대학 입학 시험도 없고 교과서는 학교에 두고 다닌다고 들었다. 하루 속히 문교 정책이 바뀌어야 하며 입시 제도를 혁신해야 된다면서. 공부가 잘 안되는 날에는 휴게실에 나와 성토 대회를 연다. 잡담하는 시간이 공부 시간보다 더 많았다. 정류소 근처 분식집에서 따끈한 우동을 먹으면서 하루 종일 씨름했던 수학 공식도, 세계사 연도도, 그리고 시국 선언까지도 다 잊어버린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기”로 다짐하며 헤어진다.

울타리에서 풀려 나온 새내기들의 발걸음으로 대학가는 활기로 가득차 있다. 대학 축전 서곡을 들으면서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고뇌하며 우리들의 전성 시대를 걷고 있었다. 여대생들의 가방은 다양했으나 그 안에는 얇은 영어 사전, 그리고 자잘한 소지품 정도다. 책은 주로 팔에 끼고 다녔다. 추운 날에도 짧은치마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까치발로 육교를 오르내렸다. 그러한 각고의 정신이 지금의 한국의 번영에 기여했을지 모르겠다. 그때 만난 미국 평화 봉사단원들의 소탈한 차림새와는 격차가 있었다.

가끔 휴교령이 내려졌다. 최루탄의 매연으로 꽉 찬 캠퍼스 주변은 살벌했다. 데모 학생들의 무기는 돌팔매 정도. 돌을 모아주던 여학생들. 다윗과 골리앗을 연상케 하나 결과는 다르다. 더러는 부상 당하여 피범벅으로 응급실로 실려갔고 주인 없는 가방들이 흩어져 있었다.

보리밭, 선구자, 침묵의 소리, 꽃들은 다 어디로, 그 당시 유행했던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커피 한 잔으로 좌절을 달랬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 암울한 잿빛 하늘 아래서 푸른 창공을 비상하는 꿈을 꾼다. 어느날 갈매기 조나단과 함께 태평양을 건넌다. 그때 가방 속에는 활명수, 반창고 등 구급 용품과 전공책 몇 권, 윤동주 시집 등. 소용도 없었던 구두와 맞춤옷들이 있었다.

결혼 후 새로 지은 학생 아파트로 옮겼다. 월세는 140불. 학교에서 주는 공동 채마 밭이 있다고 해서 밤새 꽃향기만 좇아다니다가 잠이 들곤 했다. 어느날 저녁 밥상을 차려놓고 “우리 꽃을 심어요” 느닷없는 얘기에 반응이 어설펐다. “꽃은 무슨 꽃을? 차라리 파를 심지.” 반문했던 그 사람. (겨울엔 콩나물, 파, 두부들이 시장에서 오면서 얼던 시절이긴 했으나)

갑자기 멍해지면서 승강기를 처음 탔을 때처럼 가슴이 쏵 내려앉는다. 베개를 껴안고 나와 공부방으로 옮겼다. 한복 등 혼수품들이 있는 삼소나이트 가방이 눈에 띄며 왜 그리 짐스러워 보였던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학생 때보다 숫자적으로 몇 배 되는 연봉을 받게 된다고 하여 가방 두 개만 챙겨 서부 개척이 시작되었다. 팜트리 밑의 낭만에 젖어 스모그를 안개낀 것으로 착각했다. 시간이 지나며 소낙비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도시 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부양 가족 2순위로 첫 아들이 태어났고 책가방이 자연스럽게 기저귀 가방으로 둔갑했다.

집주인의 식솔이 둘, 셋, 넷, 다섯 더해 가면서 휴가철이면 주로 캠핑을 했다. 그때는 몇 개의 배낭을 챙겨야 한다. 떠나기도 전에 타이레놀을 먹곤 했다. 침구 위에 누워서 밤하늘의 은하수, 별똥별을 보며 북극성을 먼저 찾으려 했던 아이들. 그 맛에 다시 짐을 싸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스팸을 가지고 다닌다는데 여기서는 김치병을 들고 다닌다.

동서남북으로 제각기 떠나버린 아들 딸의 임자 없는 방에서 야구, 축구, 테니스 등의 운동 가방을 보면서 시간이 건너뛰는 것을 절감한다.

양로기관에서 봉사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의 담당은 치매 기운이 있는 어르신들을 돌보아 드리는 일이다. 매일같이 웃을 수 없는 해프닝들이 생기는데 대강은 식사를 하고도 안 하셨다는 것과 당신들의 가방 속 물건이 없어졌다는 난감한 얘기들이다. 어느 할머니는 빨간 가방을 들고 오시는데 혹 그 가방이 안보이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가방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던 중 할머니와 함께 가방을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신분증명서도, 지폐도, 패물도 아닌 대나무로 만든 등 긁는 효자손 단 하나였단다. 그분들의 젊은 시절 그때의 가방 끈이 길었든지 짧았든지 지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남아 있는 것은 실체를 알 수 없는 정오의 그림자뿐이다. 명문대를 졸업한 자식들과 늘 함께 있을 수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 분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 드릴 수 있는 것은 효자 손 뿐이다. 그 딱딱하고 차거운 대나무 손!

언제가 될지 모르나 아무 가방도 소용이 없는 여행이 남아있다. 여권도, 항공권도, 구찌 백도, 빨간 가방도 필요 없는 특별한 여행이다. 바라기는 전송 나온 친지들과 함께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그 찬송의 후렴까지 함께 부른 후 홀가분히 탑승하게 되는 것이 황혼을 마주한 노년의 바람이다.


독고윤옥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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