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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상하이 박, 내 아버지

“아버지가 남자로서
이 세상에 남겨 놓은
확실한 흔적을 찾아
내가 제대로 기록해서
후손에 알려야 한다”

아들타령 하시던 내 세대의 부모님들 마음이 드디어 내 가슴에 닻을 내린다. 우리 집은 아들 둘을 힘 안 들이고 대령한 엄마의 우수한 실력으로 오히려 딸이 귀한 대접을 받았다. 두 살 터울 두 아들 뒤로 네 살 터울 예쁜 딸을 9개월 키우고 하늘로 보낸 울 엄마 아빠는 두 해 지나서 다시 딸을 얻었다. 유난히 앞의 세 아이보다 인물이 떨어지는 계집애를, 못난이에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고 공공연히 차별을 하면서 자긍심 대단한 별종으로 키웠다.

오늘은 내가 아들이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불현듯 후회 같은 게 파도를 친다. 아들이었다면 아빠의 업적을 이리 무심하게 관망하며 사라지게 두진 않았을 거라는 깨우침이 무겁게 내 머리를 흔든다. 첫 아들은 두 아이 남겨 놓고 삼십 전에 하늘로 갔고 둘째는 마음으로만 아빠를 존경하며 인정하지만 글재주가 없다.

내 몫이다. 새삼 아버지가 남자로서 이 세상에 남겨 논 확실한 흔적을 내가 제대로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알려야 한다. 하늘이 주신 글재주까지 있지만 아들들과는 달리,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란, 한 가정의 가장이고 아내에게 잘하고 아이들을 기르는 아버지일 뿐이다. 아버지가 권투선수였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을 했던 것 이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사진으로 본 젊은 시절 울 아버진, 날렵한 몸매에 얼굴이 진짜 핸섬하다. 중국 상해에서 라이트급 챔피온 시절 외국인 상대와 대결 폼으로 함께 찍은 사진이 엽서로 남아 있다. 경량급이라 그런지 운동선수 특유의 근육질 몸매가 아니다. 스물여덟에 은퇴하셨다니 현역 시절 사진의 모습은 그 보다 더 젊었을 때다. 이제야 느껴지는 아버지 모습에 마땅한 평가를 한다.



내 평생에 보아온 어느 남자의 모습도 아버지보다 멋진 사람은 없다.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운동선수 중에서도 내 마음을 이토록 흔든 사람은 없었다. 이 사진을 지금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아버지를 생각하는 잣대가 똑바로 내 가슴에 들어온 모양이다.

그만큼 내가 생겨나기 이전의 부모님과 두 오빠, 죽은 언니 사진들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로 여겼던 때문이다. 오직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내 가족들 모습만이 나의 판단능력 테두리 안에서 각인 되어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조금씩 아버지의 생활이 보이기 시작했다. 권투선수였고 은퇴하고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권투와 관련 있는 삶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으로 아버지를 인식했다.

뒤늦게 뭔가 자식된 도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을 때린다. 투병 중인 작은오빠에게 도움을 청한다. 오빠가 건강하던 십여 년 전 이미, 상해에서의 아버지 생활을 이 메일로 받아 둔 조각상식들이 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사단법인 한국권투위원회의 창립을 시작으로 맥을 이어 온 권투계의 상황을 보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른다. 한마디로 권투라는 스포츠에 전혀 관심 없던 평범한 여자 아이였을 뿐이다 나는.

오빠가 들려주는 얘기를 쓴다. 여섯 살 터울인 작은오빠가 두 번의 대장암 수술 후, 폐까지 전이된 상태로 투병 중이지만, 아버지 생애를 마지막으로 증언을 해 줄 수 있음에 내 가슴이 설레고 있다. 우리 삼남매의 단순한 아버지로서가 아닌, 대한민국 권투계의 맥을 잇게 한, 모든 권투인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탄탄한 대부로서의 입지를 내가 세상에 공개한다.

상해에서 한국으로 오던 해에 오빠는 여섯 살, 난 엄마 배 속에 있었단다. 그 오빠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 아버지는 혼자 뜻을 세우고 최초로 사단법인 한국권투위원회를 창립했다. 그 당시 권력과 재력을 갖춘 국회의원 한 분을 회장으로 모시고 일반 실무를 담당하는 사무국장으로 출범되었다. 그렇게 세운 뜻을 차근차근 계단을 옮기면서 권투라는 스포츠의 밭을 일궜다. 일제 강점기에 상해로 이주해서 일어와 중국어에 능통했기에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 동양을 어우르는 단체로 승승장구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세상 어느 단체에서나 생기는 과정을 거치면서 세월이 갔단다. 다 된 밥상에 덤벼들어 밀쳐내고 차지하고 엎치고 뒤치고 무슨 일인들 없었겠냐는 오빠의 격앙되는 소리를 들을 땐 나도 따라 가슴이 가빠진다. 결코 쉽지 않았을 초창기의 어려움을 견디는 아버지의 모습과 웬만한 경지에 올려놓은 권투위원회를 빼앗기 듯 넘기고 물러날 때의 뭉클한 고뇌를 보았던 건 여고 졸업하던 해였다.

김기수 선수를 이탈리아 벤베누티 선수와 대결할 수 있게 기회를 추진하고 이탈리아에 다녀 오셨던 기억이 멀다. 내가 결혼하고 미국 이민 와서 살 때 홍수환 선수와 오셨던 기억도 새롭다. 오빠의 도움을 받아 좀 더 상세하게 아버지 이야기를 받아써야겠다.

내 평생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버지날을 맞으며 완전 딸 바보였던 아버지가 그립다. 먹먹해지는 가슴엔 뭔가 죄송한 마음이 있다. 말로는 안 되는 감사함도 처음 맛본다. 샹하이 박, 순짜 철짜. 내 아버지. 난 아버지의 고명 딸, 박(노)기제다.


노기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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