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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산책] 피아노(P)와 포르테 (F)

'피아노(P)' 와 '포르테(F)'라는 악상 기호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피아노(P)를 '여리게'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 포르테(F)를 '강한 것'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삶의 아이러니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돌 틈 사이에서도 꽃이 피어난다. 쓰러진 나무줄기에서도 잎이 자란다. 애처로운 것들에 묻어있는 강인함은 세상을 작고 여리게 건너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피아노(P) 와 포르테(F) 는 잘 알려진 음악 악상 기호다. 피아노는 '여리게' 하라는 표시이고 포르테는 '세게' 하라는 음악적 약속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아노를 '약하게'로 해석하고 포르테를 '강하게'로 인지한다. 그러나 포르테보다 피아노가 더 큰 힘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믿을까?

성악에 있어서 포르테는 배에 힘을 주고 목을 활짝 열어주면 그만이지만 피아노는 배에 힘을 준 채 목과 뇌로 소리를 엷게 걸러줘야 하는 정제작업이 필요하다. 여리게 노래할 때 호흡이나 음 조절에 실패할 확률이 더 많을 정도로 힘든 작업이다. 피아노를 칠 때도 예외는 아니다. 포르테 (F) 라는 표시에서는 가두었던 것들을 순식간에 풀어주듯 힘 있게 두드리지만 피아노( P)라는 표시에서는 아주 작게 점을 찍듯 혼신을 다해야 한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삶을 절제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삶의 승패도 좌우된다. 그릇이 된 사람은 삶을 여리게 삭히고 걸러낸 피아노(P)의 달인이다.

센 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그런 사람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본다. 수천 년 북극의 빙하가 설산에서 바다로 떨어져 나가는 양 무섭게 무너진다. 바람에 꽃잎이 휘날려 떨어지듯 파리채에 맞은 파리가 피를 튀기며 벽에서 떨어지듯 우숩게 부서진다.



많은 순간 강한 것들은 아마추어다. 곡선이 직선보다 강하고 갈대가 쇠붙이보다 강할 때가 얼마나 많던가? 약함으로 강함을 이겨야 할 때는 또 얼마나 많던가? 목소리 큰 사람과 힘센 사람이 이기지 못할 것이 분명 존재하므로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여리게 와 약하게는 다르다. 여린 것은 강함을 포유한 상태이고 약한 것은 강함을 내포하지 않은 상태이다.

옥란 이라는 친구가 있다. 학창시절, 나는 시골에서 전학 온 그녀가 나의 뒷자리에 앉게 되면서 가까워지게 되었다. 급우들은 갓 전학 온 옥란이가 사투리를 쓴다며 놀려댔다. 그런데 옥란이는 한 번도 성을 내는 법이 없었다. 언니가 입던 반들반들 달은 교복을 입고 다니는 옥란이를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놀려댔지만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옥란이가 전교 1등을 했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아이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수군덕거렸다.

옥란이가 컨닝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옥란이가 1등을 한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 옥란이가 버스 안에서 한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나는 남하고 소리 지르며 싸우는 게 싫어. 차라리 나와 싸우는 것이 훨씬 더 쉬운걸." 그때 나는 여리게 산다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누가 소리 없이 산다고 약한 사람이라고 하는가? 있는 듯 없는 듯 군중 속에 묻혀있는 사람이라고 무시하는가? 소리 없이 사는 것은 수련이다. 한평생 튀지 않고 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평범하게 산다는 것도 에너지이지만 작게 산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내공이다.

울분과 상처를 녹여낸 자만이 작고 여리게 살아갈 수 있다. '여리게(P)' 란 안 보이는 작은 기법이 아니다. 하나하나의 음을 정확히 짚어 정제된 고단의 소리를 만드는 황홀한 작업이다. 들리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괴이한 음표이다.


김은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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