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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예술의 상상력, 말로의 바캉스

앙드레 말로(1901~76)가 화가 르누아르(1841~1919)를 만난 적이 있다. 1차 대전이 일어나기 두어 해 전 동양어학교에 다니던 청년 말로가 남프랑스의 지중해 해변에서 바캉스를 즐기기 위해 여관에 짐을 풀었다. 이국적인 마르세유나 막 요란하기 시작한 칸을 피해 굳이 이곳에 온 것은 고운 모래에 얕은 수심을 지닌 한적한 바다가 산악과 맞닿아 있어 훨씬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다.

여관의 벨보이가 알려주는 말에 말로는 가슴이 뛰었다. 르누아르가 해변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봤노라 했다. 말로는 프랑스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르누아르를 어쩌면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당시 말로는 한창 문학.미술.역사에 대한 관심이 불타올랐고 동양 문화를 탐사하기 위해 중국어와 산스크리트어까지 훈련하는 중이었으며 동시대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때였다.

하루는 아침 식사를 마친 말로가 해초 냄새로 뒤덮인 벼랑 끝 오솔길을 산책하다가 은빛 수염을 휘날리는 한 노인의 뒤통수를 봤다. 노인은 잔물결 이는 바다를 마주한 채 캔버스에 몰입하는 중이었다. 말로는 종업원이 일러준 그 대가임을 이내 알아챘다. 지난 세기의 역사를 한 몸으로 지탱하고 인상주의의 한 영역을 개척한 위인을 이런 휴양지에서 단둘이 조우하게 되다니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말로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기 위해 조심조심 그의 등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집중을 흩뜨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위대한 미술가의 제작 과정을 보기 위해서 숨을 죽였다. 그러나 말로가 그의 캔버스에서 본 것은 바다가 아니었다. 그를 만나는 벅찬 놀라움은 차치하고 캔버스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말로는 아연실색했다. 바다가 그려져야 할 캔버스엔 어느 계곡을 배경으로 목욕하는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말로는 시선을 여러 번 그 캔버스와 그 너머 바다를 오가며 바꾸어 봤지만 그려진 장면과 그 앞의 현실은 달랐다.



이 일화는 회화의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곧잘 인용된다. 르누아르는 망막한 바다에서 깊은 계곡을 상상했고 인간 부재의 환경에서 아리따운 소녀를 상상했다. 그리고 상상한 그대로 천연덕스럽게 그렸다. 열심히 대상을 집중해 그것과 다른 사실을 내놓은 셈이다. 이 일은 르누아르의 의식과 그것에 반응하는 물감과 붓질에 의해 상식의 질서와 전혀 다른 논리로 진행된다. 마치 꿈과 같다.

눈앞에 보여지는 사실과 다른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이 문제는 말로의 삶에 중요한 화두로 남는다. 말로는 그의 소망대로 인도차이나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을 탐험하고 조사했다. 단지 관찰만 하지 않고 중국의 몇몇 혁명을 지원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위한 실천도 마다치 않았다. 장제스가 벌인 북벌에 참여하고 그 경험들을 글로 발표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말로는 해방된 프랑스를 재건하는 드골 정부에 세계 처음으로 독립 부처로 창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에 임명되어 10년간 재직한다. 당시 손상된 국민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민을 위로할 문화정책이 필요했다. 말로는 특정 계층의 고급 문화와 파리 중앙에 집중된 문화 향유의 기회를 국민 저변과 지방에까지 확대하는 방안으로 지역 곳곳에 '문화의 집'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공연과 전시가 열렸고 지역민이 직접 연주, 창작할 수도 있게 했다. 오늘날 문화센터는 바로 이 문화의 집을 모델로 한다. 말로는 여태껏 수집 기능에 머문 박물관의 역할에 교육적 기능을 더함으로써 누구나 소장품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정보와 활기를 얻게 했다. 말로의 문화정책은 계층과 계층, 지역과 지역을 유기적으로 묶고 프랑스를 프랑스답게 했다.

프랑스 문화정책의 상당 부분은 말로가 청년기에 지중해 해안에서 노대가를 만난 것에 빚지고 있다. 예술가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최대한 보장하고 예술작품이 대중과 가까운 일상에서 직접 만나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게 그것이다. 우리 문화정책도 참고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전수경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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