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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글동산:안문자(한국 문인협회 워싱턴주 회원)

[시애틀 중앙일보] 발행 2017/06/21 미주판 4면 기사입력 2017/06/21 11:35

꿈을 키워준 비둘기 집

사람들은 그때의 그 집을 비둘기 집이라고 불렀다. 빨간 벽돌의 작은 이층집은 주황 노랑 연두색으로 사랑스럽게 꾸며졌었다. 지금도 눈에 선 한 그 곳. 그리운 중구 저동 2가 영락교회 건너편. 아버지의 사무실이 있던 빌딩 왼쪽으로 살짝 돌아가면 있었다. 빨간 벽돌 벽 사이로 주황색 대문이 집에 오는 사람들을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현관에서 바라보면 안방, 왼쪽엔 귀여운 부엌, 뒤쪽으론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지. 오른쪽으로 뱅그르르 동그라미를 그으며 이층으로 올라가면 탁 트인 유리벽에 의지한 응접실, 이웃집이 보였지만 쏟아지는 햇살로 겨울에도 따뜻하고 아늑했다. 책들과 잡동사니를 넣을 수 있는 붙박이장들이 갖추어졌고, 방은 세 개 뿐이었지만 노란색과 연두색의 문을 열면 작은 책상과 이층침대, 옷걸이가 속삭이는 듯 아기자기했다. 집 주위에는 아담한 집들이 옹기종기 사이좋았는데 우리 집은 귀여우니까 비둘기 집이라고 했다. 1960년 대 후반, 30평의 작은 집에서 여덟 식구가 복작대며 살았지만 좁은 줄 몰랐다.

우리는 딸 셋, 아들 셋이다. 육남매가 많이 먹고 잘 크며 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엔 아버지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서사업을 가장 왕성하게 하던 시기였다. 출판 일이 바빠지면 살림은 더 어려워졌다. 전셋집으로 전전하던 고달픈 시절, 쌓이는 빨래와 작아지는 옷가지들, 주식, 부식, 간식 준비로 어머니는 지쳐버렸다.

걱정스럽던 아버지는 뒷골목에 숨어있던 허름한 집을 싼값에 샀다. 형편도 안 되는데 용기를 낸 것은 아버지를 존경하던 건축가 지망생인 한 청년이 경험을 쌓기 위해, 그러니까 연습 삼아 설계를 하기로 했고 또 다른 분이 집 짓는 자재를 저렴하게 공급해 주어 경제적인 부담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욕에 찼던 젊은 건축가의 실력이 최고로 발휘된 작은 집은 노란색, 연두색, 주황색으로 마치 동화속의 놀이 집 같았다. 후에 크게 성공한 청년의 첫 작품이 된 그 집은 작은 공간을 빈틈없이 살려 감탄할 정도로 오밀조밀하게 필요한 건 다 갖추어 넣었다. 부엌엔 주입식 가스렌인지와 붙박이 찬장, 여덟 식구가 끼어 앉을 수 있는 작은 식탁까지 붙박이였다. 수세식 화장실은 온 동네를 뒤져야 우리 집 뿐. 재미있는 구조는 그 시절엔 드물었던 신식 디자인이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쓰던 양은이나 플라스틱의 잡동사니 그릇들을 치우고 적당한 크기의 사기접시들을 사왔다.

그 시절엔 호텔에도 뷔페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그즈음 아버지가 미국을 다녀왔는데 인상적인 뷔페 방법을 시도한듯하다. 식탁 중간에 수북이 놓여 있는 밥과 몇 가지의 반찬들을 먹을 만큼만 자기 앞 그릇에 덜어 먹는데 좀 생소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우리는 깨끗이 다 먹은 후 설거지통에 갖다 넣도록 훈련도 받았다.

버리는 음식이 없음은 물론이다. 아들, 딸 구별 없이 두 사람 씩 짝을 지어 예쁘게 써 놓은 순서대로 설거지를 했다. 소꿉놀이처럼 재미있었지만 살림이 넉넉해 진건 아니었다. 집까지 지었으니 우리는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가족들은 집에 있기를 좋아했다. 작은 집인데도 편리하게 설계 되었다는 입소문을 듣고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문사에서 취재까지 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대화하는 모습의 사진과 함께 ‘이상적인 가정생활’이라고 소개된 일도 있었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 동생 둘만 빼고 이 집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대학을 마치고 명동에서 일했으니 사방팔방 금싸라기 땅들을 앞마당처럼 활기차게 다녔다. 그 지역에서는 다 기억하리라. 여명이 동쪽 하늘을 물들일 때, 영락교회에서 울려 퍼지던 챠임벨의 찬송 소리를. 나는 학생 때 한동안 챠임벨의 건반을 연주 했다. 싸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조용하게 들어섰던 교회 안은 엄숙하고도 평화로웠다. 그 고요함을 감싸며 은은하게 퍼지던 멜로디. 명상의 아르바이트를 잊지 못한다.

결혼을 앞두고 애인이 인사를 오고 반지와 옷감이 들어있던 초록색 가방의 소박한 함이 들어왔었지. 동네에서 함이 들어온다고 구경거리가 있으려니 기웃댔지만 점잖은 함진아비 두 친구는 “목사님, 안녕하셨습니까?” 허리 굽혀 인사를 하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킥킥, 웃었다. 신혼여행 후의 잔치도, 아들의 첫돌 잔치도 이 비둘기 집에서 했다. 비둘기 집은 내가 공부하고 성숙하는 과정을 다 보아 주었다. 동생들은 유학에, 언니와 나는 결혼, 막내둥이는 부모님과 함께 이민을 갔으니 슬프게 이별했던 곳도 그 집이었다. 한 번 헤어지니 다시 합쳐지지 않았다. 자기들의 길로 가고 말았으니까.

세월이 흐른 뒤, 부모님이 정착한 시애틀의 북쪽인 머킬티오로 기적처럼 육남매 가족이 다시 모였다. 계곡의 물처럼 흘러간 30년의 세월. 속절없이 흘러간 나날 속에 부모님은 하늘나라로, 후손들은 푸른 꿈을 안고 동쪽, 서쪽으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남겨진 형제들은 빈 둥지를 지키며 늙어 가는데.....한 세상 이리도 잠간이구나. 멀리, 아이들의 소식이 오고갈 땐 쓸쓸한 눈빛 감추다가 마주보며 웃는다.

아, 우리가 행복했던 비둘기 집. 몇 번의 주인이 바뀌더니 지금은 구두공장이 되었다네요. 그러기에 추억이란 아름답고도 슬픈 것이라 하는 것이지. 젊은 날은 지나갔고, 비둘기 집은 안개 속에 있다. 그러나 또렷하게 남은 건 살아온 세월의 감사다. 남은 삶의 감사도 넘치게 이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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