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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국의 [알짜 캐나다]

캐나다 최초의 '맥도날드' 연방수상

존 맥스웰 알렉산더 맥도날드는 캐나다 최초의 수상으로 1815년 1월 11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휴 맥도날드는 1811년 부인인 헬렌 쇼를 만났다.
사업을 했으나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고 사업에 실패한 후 1820년에 새로운 기회와 땅이 필요했던 다른 이민자들과 더불어 어퍼 캐나다의 킹스턴으로 이민했다.


휴 맥도날드는 이민을 하고 나서부터 성공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 미래의 수상 존 맥도날드는 10세가 되자 그는 킹스턴의 미드랜드 초등학교로 보내졌고 14세에 학교를 마치고 15세에 법률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하고 1834년에는 변호사가 되어 킹스턴에서 개업했다.
만년에 맥도날드수상은 어린 시절의 즐거움이 그에게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1837년 어퍼 캐나다에서 정치적 불만으로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 민병으로 참가하기도하고 윈드밀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미국인 공화주의자들을 변호하여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확고하게 변호함으로써 명성을 날렸다.


1843년에는 28세의 나이에 그와 엄마 쪽으로 사촌인 이사벨라 클락과 결혼했다.
결혼 후 이사벨라는 알 수 없는 중병에 걸려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며 치료를 받게 됐다.


그들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 아들인 존 알렉산더는 13개월 되던 때에 죽고 둘째 아들 휴 존 은 1857년 이사벨라가 사망하자 맥도날드의 누이인 마가렛 과 남편 제임스 윌리암슨에 보내져서 키워지게 됐다.
이후 휴 존은 정치가가 돼 매니토바주의 주 수상이 됐다.


1867년에 맥도날드는 52세의 나이에 2번째 부인인 20년 연하의 수잔 애그니스 버나드(1836-1920)와 결혼했다.
그녀는 맥도날드의 정치적 활동에 관심이 많아서 종종 하원에 출석하여 맥도날드의 활동을 보곤 했다.


그들에게 마가렛 메리 디오도라 맥도날드(1869-1933)라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뇌수종을 가지고 태어나서 일생 육체적,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었다.
맥도날드는 항상 그녀가 낫기를 기원했지만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44년 28세의 변호사였던 그는 정치에 흥미를 보여 캐나다의 주의원이 되었고 동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해 1847년에는 윌리암 헨리 드레이퍼 정부의 국세청장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그는 드레이퍼 정부가 다음 선거에서 패배하여 그 직을 계속하지는 못했다.
그는 보수당을 떠나 보다 온건하고 마음에 맞는 정치를 하려 했다.


1854년에 앨런 맥냅이 자유-보수성향의 당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
몇 년 안에 이 당은 중도 개혁파와 오래된 보수파를 모두 끌어 모았다.
이 당은 1854년에 집권하게 되고 맥도날드는 법무장관으로 임명 됐다.


내각에 있는 동안 다른 동료가 수상을 할 때에도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각료였다.
결국 그는 1856년과 1857년에는 캐나다 이스트의 에티엔 파샬 타쉐와 공동으로 캐나다 주의 공동 수상을 하게 돼 권력의 중심에 올랐다.


타쉐는 1857년에 사임하여 죠르즈-에티엔 카티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1858년 선거에서 맥도날드-카티에 정부는 선거에 패배하고 그들은 수상직을 사임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캐나다 총독이 선거에 패배한 카티에 에게 일주일 뒤에 다시 수상직을 받아 들일 것을 요청하여 맥도날드와 더불어 그 자리를 수락했다.


그 당시의 법은 내각의 각료가 사임한지 한 달 내에 그 자리에 다시 복귀 할 수 있었다.
맥도날드는 특히 국내 식민지간의 철도공사를 옹호하고 상호간의 통신을 중요 하게 여겼다.
캐나다는 영국의 식민지 담당부, 노바스코시아, 뉴 브런스위크와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하여금 그의 야심적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했다.


연립정부는 1862년에 다시 선거에 패배 했고 맥도날드는 1864년 까지 야당의 당수로 당을 이끌었으며 타쉐는 다시 은퇴에서 복귀하여 맥도날드와 협력하여 집권하게 됐다.


맥도날드는 캐나다가 연방으로 뭉치고 거대한 국가로 탄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4년 대서양 주들의 샤롯트 타운 회의와 퀘벡 회의에서 캐나다의 여러 주들이 연방으로의 통합을 위한 72개 조항을 합의하고 캐나다 이스트와 캐나다 웨스트가 함께 캐나다주로 참가하고, 노바스코시아주, 뉴 브런스위크주가 런던 회의에서 브리티시 노스 아메리카 법을 발의하여 1867년 5월22일 영국 상원에서 통과되어 7월1일 캐나다가 탄생하게 됐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캐나다가 연방으로 합쳐지게 되는 데에 맥도날드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을 치하하여 세인트 마이클과 세인트 조지 총 사령관 작위 수여를 결정하고 1867년 7월1일 연방의 탄생일에 맞춰 발표했다.
8월에는 선거가 실시되어 맥도날드와 보수당이 집권했다.


맥도날드는 수상으로서 나라를 키우고 통합하려 했다.
그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나라를 꿈꿨다.
따라서 그의 통치하에 캐나다는 루퍼트 랜드와 노스 웨스트 테리토리를 허드슨 베이 회사로부터 30만 파운드에 구입했다.
이 땅들은 노스웨스트 테리토리로 됐다.


서쪽으로 서서히 철도가 건설되며 이민자들의 정착이 되게 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해오던 원주민들과 프랑스와 원주민 혼혈의 메티스들의 생존이 달린 토지에 대한 권리가 무시되어 레드리버에서 1869년에서 1870년에 걸쳐 반란이 일어나게 됐다.
1870년에 국회는 매니토바 법을 통과시켜 루이 리엘의 레드 리버 반란에 대한 조치로 노스웨스트 테리토리에서 매니토바주를 만들었다.


1871년에 영국은 BC주를 연방에 6번째 주로 추가했다.
맥도날드는 BC주를 연방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려고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약속했는데 그의 정적들은 이 약속은 비 현실적이고 비싼 약속이라고 비난했다.
1873년에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 연방에 참여했다.
맥도날드는 광대한 노스웨스트 테리토리에서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북서 기마 경찰대를 창설했다.


1873년 퍼시픽 스캔들로 알려진 철도공사 계약을 수여한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맥도날드는 사임하게 되고 자유당 지도자 알렉산더 메켄지가 과도정부를 수립 하게 된다.


1874년 의 연방선거에서 자유당의 매켄지가 승리했다.
맥도날드는 1878년에 권력에 다시 복귀하게 되는데 그의 국가정책 덕분이었다.
약속했던 캐나디안 퍼시픽 철도 공사의 재개와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캐나다 산업을 보호 하기 위해 국내 교역을 확대 해야 된다는 정책이었다.


캐나디안 퍼시픽 철도는 1885년에 완성됐다.
그 해에 메티스의 지도자 루이 리엘이 캐나다에 돌아와서 사스카치완에서 노스 웨스트 반란을 주도했지만 철도가 이미 그 지역에 부설되어 북서 기마경찰대가 반란 진압을 위하여 신속히 배치됐다.


반역죄로 기소된 리엘의 재판과 그의 처형은 문화적으로 프랑스계였던 리엘을 지지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맥도날드를 지지하는 영국계 캐나다인 사이의 정치적 분열을 가져왔다.


1891년에 맥도날드는 다시 선거에 승리했으나 이미 76세의 백전노장인 그는 과로와 스트레스, 음주 및 몇 차례의 발병으로 고생하게 됐다.
결국 1891년 5월29일 심장마비로 말을 못하게 되고 회복하지 못해 6월6일 에는 세상을 뜨게 됐다.


그는 캐나다 상원의 한 방에 수천 명의 조문 속에 정장을 한 채로 안치됐다.
지금 그는 오타와의 국회 의사당 중앙건물에 정장을 한 채로 안치돼 있다.


그의 국장은 6월9일 거행되었고 온타리오주 킹스턴 근처의 카타라키 묘지에 묻혔다.
그의 자녀들은 후사가 없었고 친척은 오직 휴 게인스 포드만 살아 남아있다.

1891년 그가 별세했을 때 그의 정적이며 후에 캐나다 연방 수상을 역임한 자유당지도자 윌프레드 로리어는 맥도날드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과장하지 않고 말해도 그의 생애는 그가 국회에 들어온 그날부터 바로 캐나다의 역사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당시 작은 2개의 이질적인 작은 주에 불과했던 캐나다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에 연결되고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수상으로서의 정치경력은 19년이었고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장기간 연방 수상직을 역임 했으며 6번의 다수 정부를 구성한 유일한 수상이었다.
프랑스와 영국 계통의 두 문화를 아우르는 거대한 국가를 만들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정치적 견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한 수상으로 찬양 받고 있다.


맥도날드는 캐나다 10달러 지폐에 그려져 있고 공항, 다리, 고속도로, 그리고 수도 없는 학교들에 그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맥도날드 수상과 그의 아들 휴 존 맥도날드는 그가 별세하기 직전 아들과 잠시 캐나다 하원에 의원으로 같이 있었다.


2004년에 맥도날드는 캐나다 방송공사가 실시한 조사에서 시청자들이 뽑은 10명의 위대한 캐나다인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됐다.
그는 또한 일부 정치학자들에 의해 캐나다 보수당 전통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맥도날드는 1844년 킹스턴의 세인트 존 로지 5번 에서 프리메이슨 단원이 되었으며 1868년에는 영국의 총본부인 유나이티드 그랜드 로지로부터 캐나다 총 본부 근처의 영국 총본부 대표로 선임되어1891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그의 최종 직책은 패스트 그랜드 시니어 워든이었다.


▶이제국=고려대 경영학ㆍBCIT 식품학 전공ㆍ산우회 '밴팩' 운영ㆍ영어, 과학 튜터 eznati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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