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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산책] 바깥 풍경과 조용한 응시

최하림 시인이 생전에 쓴 '메아리'라는 시를 최근에 다시 읽었다. "오래된 우물에 갔었지요/ 갈대숲에 가려 수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바위 아래 숨은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 다음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가만히 물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이유라도…/ 하고 메아리가 일었습니다/ 그와 함께 수면이 산산조각 깨어지고 얼굴이 달아났습니다/ 나는 놀래어 일어났지만 수면은 계속 파장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는 고요 속으로 가만히 내려간다. 바깥을 응시하던 시선이 내면을 응시한다. 시인은 숨어 있는 옛 우물을 찾아 간다. 목을 축인 후에 그 우물에게 묻는다. 우리가 이처럼 살아야 할 그럴듯하게 괜찮은 이유가 있느냐고. 우물의 수면에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을 것이므로 이 물음은 자신을 향해 던진 물음이기도 하다.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일어나고, 그 목소리 때문에 수면이 흔들리고,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흩어지고, 목소리의 메아리가 공중으로 퍼져서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것을 찬찬히 듣고 바라본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요즘의 우리에게도 이 시에서처럼 바깥 풍경에 대한 조용한 응시의 시간이 과연 있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물을 것도 없이 나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다섯을 셀 동안에 걸쳐 하나의 바깥 풍경을 오래 응시한 적이 있었던가. 쫓기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를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시인 김용택 선생님을 뵌 일이 있었다. 선생님은 섬진강 강변 옛집에 살고 계신다. 동네에는 열 두 가구가 모여 산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은 나를 가만히 흔들어 깨웠다. "72년을 한 나무 밑을 지나다니면서 살았고, 72년을 똑같은 산을 바라보며 살았고, 72년을 같은 얼굴을 보고 살았어요. 살았는데, 한 번도 질려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너무나 심심하다 보니까 모든 것들이 자세하게 보였어요. 새가 날아가는 것도, 눈이 오는 것도, 비가 오는 것도, 할머니들이 농사짓는 것도 자세히 보여서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내 시로 들어왔어요."



조금은 지루한 시간을 참다보면 바깥이 상세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다보면 바깥을 바라보는 자신의 내면도 함께 보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매순간을 스스로 분주하게 하지 않으면,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속이 항아리처럼 깊어진다는 말씀이었다. 별다른 일도 아닌 일을 자꾸 만들면서, 몸과 생각의 소음을 만들면서, 안달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또 얼마 전에는 법정 스님의 생전 법문을 들었는데, 스님은 유리잔의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새순을 펼쳐 자라고 있는 고구마를 햇살이 좋은 창가에 놓아두고 가만히 마주한다고 하셨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간에 행복이 온다고, 사는 일이 새삼스럽게 고맙게 느껴진다고 하셨다. 행복과 불행은 외적 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수용에 있다는 말씀이었다.

'수일불이(守一不移)'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물건을 오롯하게 응시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산란한 생각들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저절로 고요함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응시하는 일은 평정된 내면에 이르게 한다. 평온을 찾은 사람이 되게 한다. 평정된 내면에 이르게 되면 바깥과 안쪽, 대상과 내심(內心), 남과 내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응시하면 대상이 소상하게 보이고, 이해하게 되고, 그 대상이 가진 이점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은 내 마음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응시하면 내 내면의 눈이 그윽해진다. 조용하게 들으면 내 내면의 귀가 커진다.

이즈음에는 물드는 나뭇잎을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도 좋을 것이다. 한쪽 구석에 빈 의자가 놓여있는 것을 바라보아도 좋을 것이다. 숲을 갈 적에는 떨어져 있는 솔방울을 쥐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솔방울을 쥐어 들고 있으면 솔방울 속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문태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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