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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그레이 칼럼] 봄의 전령들

좀 이르다 싶지만 이웃에 목련꽃이 활짝 폈다. 그 집 목련 두 그루는 나 사는 동네의 봄의 전령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임무를 수행한다. 상큼한 꽃을 보니 싸늘한 기온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웃을 다니며 둘러보니 곳곳에 봄의 기운이 가득하다. 노란색 개나리꽃에 가슴 술렁이다 넓은 뜰에 흩어진 양떼들 사이로 폴짝거리는 어린 양들의 앙증스런 모습이 귀여워 길가에 차를 세웠다. 지난달 중순에 처음 본 새끼들이 빠르게 자라서 벌써 걸음걸이가 단단하다.

펜스 가까이로 다가가니 양들이 우르르 나를 피해 떠나는데 한 어미 양은 오히려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 옆에 바싹 붙어 오는 새끼도 두려움이 없었다. 적당한 거리에 멈춘 그들과 눈을 맞추며 한참을 마주봤다. 따스한 기분을 주는 동물들의 눈길에 얼마전에 다녀간 큰딸과 손주의 모습이 엇갈렸다. 만사에 질문이 많은 아이는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엄마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엄마 옆에서 든든했다. 눈 앞의 어미 양도 새끼에게 무엇을 설명하는 것일까.

워싱턴DC에 있는 딸의 집은 도시 중심가에 있는 콘도이다. 위치는 멋지게 근사하지만 평수가 적어서 무엇이든 하나를 사면 하나를 없앤다. 작은 공간이라 살림살이는 최소한 간소하고 수납장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데 아이가 생기면서 그 좁은 공간이 더욱 좁아졌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뜰이 있고 평수가 넓은 집으로 옮긴다지만 아직 확실한 결정이 없다. 아들의 책과 장난감을 위해서 자신들의 책을 창고로 보낸 딸과 사위의 생활공간은 서서히 손자의 놀이터가 되었고 아이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모든 살림살이는 장난감이 됐다.

외가에 온 아이는 온 집안을 넓은 놀이터로 생각했다. 숨바꼭질 놀이를 좋아했고 집안 곳곳에 꽉 채인 물건들을 뭐든 만지고 열어보고 두드렸다. 여기저기 쌓여서 평소에 내 눈에 보이지 않던 물건들이 아이의 눈을 통해서 흥미로운 장난감들로 변했다. 예전 딸의 방은 딸의 결혼 후 침대를 없애고 책장을 집어 넣고 책상옆에 넓은 테이블을 놓고 내 도서실로 바꾸었다. 솔직히 추억이 담긴 물건들과 바닥까지 쌓인 책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방의 옷장에 딸이 보관한 물건들은 그대로 있다.



이번에 딸이 아이를 데리고 그 방에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 있는 박스에서 온갖 봉제인형들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하나씩 건네받으며 좋아하던 아이가 봉제인형들이 너무 많으니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딸은 멈추질 않았다. “이것은 내 첫번째 테디 베어”, “이것의 이름은…” 줄줄이 나오는 봉제인형들은 수 십년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 였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모은 모습과 색깔이 다른 곰 인형들이 꼭꼭 숨어 있다가 딸이 이름을 부르자 반갑게 나타났다.

그런데 박스 안에서 한 인형을 찾은 딸이 반가운 탄성을 질렀다. “리사!” 리사는 플라스틱 인형인데 딸이 손자의 나이인 2살적에 함께 놀던 인형이다. 딸과 리사는 단짝 친구였다. 딸은 집안에서 리사를 안고 업고 다녔고 여행할 적에는 리사의 얼굴은 내 놓고 몸은 작은 백팩에 담아 등에 짊어지고 다니며 자기가 보는 것을 리사에게 설명해줬다. 리사가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던 딸이 성장해서 엄마가 됐다. 딸과 내가 오래전 추억을 회상하는 동안 테이블 위의 신기한 물건들을 들쳐보던 아이가 “할머니, 왠 가위를 이렇게 많이 가졌어요?” 현실로 돌아온 어른들은 얼른 위험한 물건들을 치웠다.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서 죽는 순환하는 삶은 대대로 이어진다. 한 인간이 살았던 흔적도 끊임없이 변한다. 그 순간을 사는 사람이 가진 추억은 그 사람의 몫이고 다음 세대는 자신들의 몫인 다른 추억을 만든다. 내 어린시절에 딸이 없었듯이 딸이 자란 과거에 손자는 없었다. 내게 소중한 모국에서의 추억은 딸에게는 생소하고 딸에게 소중한 봉제인형이나 리사는 아이에게 아무런 인상을 주지 않았다. 아이가 만들 추억이 훗날 아름답게 회상되길 바라니 아이가 내 집안을 온통 놀이터로 바꿔도 좋았다. 아이는 봄을 알리는 목련꽃 같은 새로운 세대의 전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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