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산책] 첫 선교사 알렌의 변신
옥성득 교수 / UCLA한국기독교학
선교사로서 알렌은 실패했는가. 그는 한국어를 못해 한 명의 한국인도 개종시키지 못했다. 성격이 까다롭고 포도주와 파티를 즐겨 동료 선교사들과 갈등하다가 결국 선교사직을 버렸다. 그러나 의료행위 자체가 기독교 사랑의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가 제중원 첫 해에 1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한 것이나, 콜레라 유행 때 많은 생명을 구한 것은 교육선교나 전도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위로부터 아래로의 선교 방법은 타당한가. 알렌은 씨뿌리기 전에 밭을 고르듯이 병원을 통해 직접 전도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합법적인 수단인 기독교 문명을 통해 한국을 기독교화하는 장기전을 추구한 신중론자였다. 반면 언더우드는 불법적이라도 직접 전도를 통해 개종자를 만들고 교회를 세우려던 열정주의자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에비슨 의사의 폭넓은 의료 선교론을 이해하게 되면서 1895년부터 기독교 문명을 통한 한국의 기독교화와 근대화 안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 알렌-에비슨-언더우드 노선은 평양의 마페트 노선과 격전을 벌이게 된다. 이후 서울과 평양의 교회 모델은 상호 경쟁, 보완하면서 한국 교회를 이끌어 왔다. 그러나 기독교 문명론은 세속적 기구주의, 문화 제국주의, 민중의 삶과 유리된 귀족주의로 빠질 수 있고, 알렌은 결국 강한 자의 편에 서서 특권을 취하다가 올무에 걸렸다. 그가 제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의학교에서 미래의 한국 의사를 교육하고 고종의 시의로 정부의 호의를 얻을 때, 그는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자본과 정치를 섬기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속인으로 변신했을 때, 욕망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sungoa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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