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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칼럼]탁영금(濯纓琴) 같이 올곧게 살았던 선비 김일손

탁영은 조선전기 학자였던 김일손의 호다. 세조 때 태어나 성종 17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엘리트 관리였다. 성종 때 유능한 문신에게만 주어지는 사가 독서에 뽑혔다. 유능할 뿐만 아니라 심성이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로도 유명했는데, 왕인 성종마저 “김일손이 성품과 행적이 너무 준엄하고 심히 곧으니 그의 노성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올곧음이 죽음을 재촉하게 한다. 연산군이 왕이 된 지 4년째 되던 해에 일어난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사망하면 바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사초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이 사초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성종의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弔義帝文)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스승인 김종직이 쓰고, 김일손이 기록한 것으로, 당시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사초를 미리 읽어보면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중에 이극돈의 잘못도 함께 적혀 있었다. 자신이 왕후가 상을 당했을 때 관기를 가까이 한 죄와 뇌물을 받은 일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이었다. 자신의 비행이 실록에 실리는 것이 두려웠던 이극돈은 연산군에게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은 사실을 애도하는 내용을 중국의 고사를 들어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라며 희대의 간신으로 유명한 유자광과 함께 김종직과 김일손이 왕을 능멸했다고 고해바쳤다.



가뜩이나 사림파들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연산군은 사초를 자기에게 올리게 하라는 명을 내린다. 사초를 읽고 분노한 연산군은 김일손을 불러들여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凌遲處死)형을 내린다. 독재군주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끝까지 꺾이지 않았던 그의 직필정신은 그의 호 탁영(濯纓) 이라는 뜻과 같이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초탈하게 살면서’ 34살이라는 짧은 생애로 끝나 버렸다. 제 이의 사육신이었던 셈이다. 굳이 말하자면 사칠신(死七臣)이라 할 수 있겠다. 사림파의 젊은 기수로서 폭군 연산군의 독단과 훈구파의 전횡과 부정부패와 맞섰던 김일손은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새로운 사상과 정치 이념으로 현실을 냉철히 인식하였고 적극적인 언관과 사관 활동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죽음으로 맞서 싸워 조선 오백 년의 학문과 정치적인 바른 기틀을 닦아 놓았다.

그는 이런 짧은 삶을 살면서 사가독서로 공부에 몰두하다 틈이 날 때마다 거문고를 즐겨 탔다. 선비들에게 거문고란 단순히 여흥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수양의 도구이기도 했다. 거문고의 곧고 장엄한소리는 헛된 생각을 쫓고 삿된 욕심을 사라지게 만든다 해서 선비들은 거문고를 항상 가까이하며 정신을 수양하는 도구로 삼아왔다.

그가 어느 노파의 집에서 얻은 백 년이 넘은 오동 문짝으로 만든 거문고의 이름이 탁영금이다. 김일손은 이 거문고를 타면서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초탈하게 살면서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정신과 행동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정치와 경제적으로 혼탁하게 돌아가는 현 사회에 그가 타는 탁영금의 소리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태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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