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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를 담은 붓글씨'

[리뷰]
LA카운티미술관 '한국 서예전'

손글씨 쓰기를 잊어버린 디지털 세대에게 붓글씨는 신비로움 그 자체다.

글자가 그저 의사소통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품격과 향기를 담은 그릇이라는 정신적 차원의 세계.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붓글씨는 동양정신의 척추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처럼 글씨가 곧 사람을 말해준다고 믿는 것이다. 펜글씨밖에 없는 서양 문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세계다. 또한, 우리가 오늘날에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적 가치이기도 하다.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선을 넘어서: 한국의 서예전'은 그런 점에서 큰 감동을 준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신비롭기는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를 비롯한 동양 사람들에게는 푸근하고 편안하기 그지없다.



서예전은 거창한 예술작품들을 펼쳐놓기보다는, 역사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 존재했던 붓글씨의 향기와 자취를 보여준다.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 기획의도를 읽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선사시대로부터 고구려를 거쳐, 조선시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를 망라하고, 왕으로부터 사대부, 승려, 평민,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 사람들의 글씨, 도자기나 자개 상자, 불경, 목판본 책자, 일본어 등 외국어 교재, 비석의 탁본, 문방사우 등등 글씨에 드러나 있는 삶과 이야기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예술작품으로 빼어난 글씨보다 삶의 이야기와 사람냄새를 생생하게 전하려는 것이다. 추사가 아내와 며느리에게 보낸 한글 편지나 노비들의 이름이 적힌 문서 등 서예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유품들을 폭넓게 전시한 것도 그런 의도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시작품 중에 명작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불(自身佛)' 등 추사의 작품 8점을 비롯해 훈민정음 해례본, 안평대군이나 효종의 어필, 신사임당, 오세창, 안중식 같은 대가의 글씨 등 국보급, 보물급 작품 등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 작품들을 LA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기쁨이다.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LA타임스의 칭송이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번 전시회가 관심을 모으는 또 하나는 붓글씨가 가지는 오늘날의 의미와 예술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려는 기획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커다란 광개토대왕 비(碑)와 반구대 암각화 탁본이 걸려 있고, 그 사이에 현대적 작품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에서도 그런 의도가 읽힌다. 그래서 김충현, 이응로, 서세옥, 이강소, 박대성, 윤광조, 정도준 같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작품수나 크기에서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안상수, 김종원, 천경우 같이 지극히 현대적인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서예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2000년 이어져오는 전통을 되돌아보는 구성인 것 같다.

남가주의 서예가 하농 김순욱 선생의 작품 '무(無)'와 전각작품을 만나는 반가움도 크다.

어째서 빼어난 서예 전문가가 아닌 화가들의 작품이 중심을 차지하는지, 작가 선정의 기준은 무엇인지 등이 애매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아마도 전시기획자의 뜻은 글씨와 그림은 본디 같은것 이라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는 동양 철학을 전해주고, 전통적 아름다움이 새롭게 재창조된 세계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이번 전시회는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아담한 아름다움으로 꾸며져 있어서 정겹고 편안하다. 또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박물관 측의 정성이 고맙다. 거창하고 요란스러운 전시회를 기대한 사람들은 어딘가 아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섭섭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어딘가 모자라는 듯 허전하고 빈 공간, 꽉 채우지 않고 비워둔 쓸쓸함이 바로 한국미(美)의 소중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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