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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파리 코뮌과 ‘피의 일주일’

1870년 7월19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프로이센은 처음부터 프랑스를 압도했다. 프랑스는 스당 전투에서 대패, 나폴레옹3세를 포함한 8만3천 명이 포로가 됐다. 나폴레옹 3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에선 공화정이 선포됐다. 프랑스 정부는 항전을 국민에게 약속했으나, 다음해 1월 프로이센에 항복했다.

임시정부는 프로이센과의 강화조약을 맺으려 했지만, 대다수 프랑스 국민은 이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동자 계급으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은 프로이센 군에 맞서 계속 항전할 것을 선언했다. 파리 시민들은 항복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 방위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파리의 노동자들과 시민들은 1871년 3월 18일 새로운 정부를 선언하고 나섰다. 기존의 군대 대신 시민들이 직접 무장했고, 새로운 행정·대의기관을 만들었다. 이른바 ‘파리 코뮌’이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자치정부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에 적기(赤旗)가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베르사이유의 임시정부는 스스로 군대를 무장 해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파리에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국민방위군이 여전히 무장한 채로 있었고, 엄청나게 많은 대포가 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고스란히 국민방위군의 수중에 남아있었다. 티에르 행정장관은 비누아 장군에게 대포 탈취 명령을 하달했다. 비누아의 군대가 3월 18일 새벽 3 시, 야밤을 틈 타 몽마르트르에 진입했다. 대포 탈취는 생각보다 쉬울 수 있었다. 방어가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포를 운반할 말들이 얼마 되지 않았다. 결국 아침까지 군대는 몽마르트르에 머물러있을 수밖에 없었다. 군대의 진주를 알아차린 파리 시민들은 분노했다.

사람들이 대포와 기관총을 향해 달려들었다. 군대가 대포들을 밤새 연결해 묶어 놓은 덕에 대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장군이 “사격 개시!”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한 장교가 장군보다 더 큰 목소리로 “총을 들어 개머리판을 세워!” 하고 외쳤다. 병사들은 장교가 시키는 대로 총을 쏘지 않았다. 이 장교는 나중에 총살당했다. 포로이센에 항복한 뒤 오히려 파리를 적으로 보았던 베르사이유의 임시정부에 맞서 파리 시민들이 몽마르트르를 지키고, 자신의 운명을 지킨 첫 날은 이렇게 밝았다. 그러나 파리 사수는 오래 가지 못했다. 코뮌은 같은 해 5월, 일주일 동안 파리의 거리 마다 바리게이드를 사이에 두고 코뮌 군과 임시정부군 간의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코뮌 군이 파리 동쪽까지 후퇴하자 프로이센 군이 그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동쪽 외곽 지역에 1만 명의 군인을 주둔시켰다. 도망갈 길이 막혀 버린 코뮌 군과 코뮈나르(코뮌 가담자)들은 최후까지 저항했다. 5월 28일, 코뮌 군의 마지막 저항지는 시내 한가운데의 페르-라셰즈 묘지였다. 화력과 병력에서 열세였던 코뮌 군은 비석을 방패삼아 최후의 항전을 벌인다.

마침내 탄약이 떨어지고 정부군에 사로잡힌 147명의 코뮌 전사들은 묘지 동쪽 벽에 선채 전원 총살되었다. 정부군은 코뮌이 무너진 뒤에도 대대적인 노동자 소탕에 나서서, 파리의 페인트공, 기와공, 제화공의 반 이상을 살해했다. 엄청난 대량 학살이 이 때 일어났다. 파리의 거리, 거리를 체리 빛깔처럼 붉게 물들였던 이 전투는 나중에 프랑스 역사에서 ‘피의 일주일’로 기록된다. 독일군과 손잡은 정부군의 공세 속에 ‘피의 일주일’ 등을 거치면서 3만여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거나 유형당했다. 파리 코뮌은 단 두 달로 단명했지만, 그후 세계사에 긴 파장을 남겼다.

오늘날 몽마르트르는 종교적 분위기와 미술사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광광명소로 바뀌었다. 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서면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속세의 형식적인 삶을 거부하고 진정한 자유를 꿈꾸던 예술가들의 고향으로 낭만이 가득한 장소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1889년 10월 6일, 여기에 저 유명한 ‘물랑루즈’가 문을 열었고, 갑자기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영화 ‘물랑루즈’는 이 시절의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인상주의의 마네, 모네, 드가, 피사로, 르노와르, 반 고호, 고갱, 세잔느, 쇠라, 입체주의의 피카소, 조르쥬 브라크 등 수많은 화가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또 작가인 에밀 졸라, 음악가인 쇼팽 등 수 많은 예술인들의 활동무대였다.

몽마르트르 언덕 위의 사크레쾨르 사원은 전쟁 직후 패배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프랑스 인들의 염원이 모여 지어진 성당이다. 성당치고는 드물게 건물 전체를 흰 돌로 장식해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했다. 그러나 아무리 성당이 아름다워도 참담했던 패배의 역사까지 바꾸거나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전쟁을 계기로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독일에 넘겨주고 2등 국가로 내려앉았다. 프랑스는 오늘날까지도 독일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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