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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을 보고

11월 29일 시카고 중앙일보 주최로 영화 ‘국가 부도의 날’ 시사회가 나일스 AMC극장에서 열렸다. 150여명의 한인들이 모처럼 뜻 깊은 저녁 시간을 보냈다.

이 영화는 1997년 11월 대한민국이 경험했던 경제 위기, ‘IMF 위기’에 대한 이야기다. 김혜수, 유아인 두 배우는 빼어난 연기로, 풍전등화 같은 처지에 있던 한국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는 아시아 경제 위기라고도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아시아 전체를 휩쓸었다. 그 해 7월 태국에서 시작돼 연말까지 이 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아시아국가가 거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인도네시아, 태국의 상황이 제일 심각했다. 원인은 국내 정치•경제와 현대 세계의 복잡한 상황까지 겹쳐 한정된 지면과 필자의 지식 부족으로 깊이 언급할 수 없음을 미리 밝히고 싶다. 다만, 역사가로서 영화를 관람하며 느낀 바를 몇 자 적으려 한다.

영화를 관람하던 중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부도”란 말은 “죽음” 다음으로 제일 큰 공포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개인의 빚이 많아 갚을 수 없으면, 즉 부도가 나면, 노예가 돼 자기 일생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그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개인에게 부도라는 것이 이렇게 큰 영향이 있는데, 한 나라에는 어떨까? 나라가 부도가 나면 어떻게 되나? 나라의 “죽음,” 즉 나라의 존재가 없어지는가? 이런 생각을 하던 중, 조선 멸망 5년 전에 있었던, “국채 보상 운동”이 문득 생각 났다.

때는 1905년 말에서 1906년 전반이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제국주의는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일명 보호조약)을 강요하여 외교 주권을 강탈했다. 조약을 반대하여, 민영환을 비롯한 중신 몇 분이 자살까지 했다.

“나라가 곧 망한다.” “조선이 일본에 빚을 많이 져서 그렇다”는 소문이 민간에 퍼지자, 길가에 행상인들이 늘어 섰다. 이들은 물건을 팔러 나온 것이 아니라 개인 소유의 금•은 비녀, 노리개, 보석 반지, 팔찌를 나라에 받침으로서 나라를 구하려고, 보자기를 들고 나와 서 있었다.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가?

나라가 망하기 몇 년 전의 혼란 속에서 이 보물들이 정말 나라를 위하여 쓸 수 있는 사람들 손에 들어갔는지,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고종 황제께서 소문이라도 들으셨는지 알 수 없다. 한가지 명확한 것은 조선 민족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나라보다 사익을 차리는 사람이 득세 했다는 것, 또 시기가 너무 늦어 일반 서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후 112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세상이 여러 번 바뀌었다. 일제 강점시대를 거쳐, 나라가 분단되고 남북이 정반대 이념에 따라 2개의 국가로 분단됐다. 남한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으나, 동족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독재라는 진통 시기를 지난 후 1987년에야 민중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 IMF 위기는 그 10년 후 일이다. 그렇지만 대한제국 말년, 1905-1906년의 “국채 보상 운동” 시기와 1997년의 IMF 위기 때는 유사성이 있다고 느꼈다.

필자가 생각하는 유사성은 일반 국민에 관한 상황에 국한돼 있다. 대한제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국가 경제 파탄으로 심한 고충을 겪은 것은 일반 국민이었다는 것이 유사성의 하나다. 1997년에는 가정의 재정이 무너져 가장이 자살한 일이 허다했다. 자살률이 무려 42% 증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은 나라를 걱정했다. 11월 29일 관람한 영화에는 잠깐 등장했지만 국민들은 1905-1906년 대한제국 시절과 비슷한 노력을 했다. 금 은 패물, 가족의 귀중품을 내놓으며 국가의 부도를 막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개인의 희생이 현대 국가의 막대한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고 결국 한국은 IMF 구제를 받아야 했다.

이런 국민의 희생은, 영화에서 보여준 대로, 극소수의 거부들, 고관 대작들, 기회포착에 능한 기회주의자들의 행동과 대조된다. IMF 위기는 그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어, 재산은 보다 더 늘고, 권세는 더 강해졌고, 신생 거부까지 등장했다.

사회적으로도, 1997년 경제 위기는 여파가 컸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많은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다. 별거와 이혼의 급증으로, 많은 고아들이 나타났다. 이전 한국식 사상으로는 생각할 수 없던 상황이다. 20여 년 후인, 현재 한국에서 상영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보육원에서 고아로 자란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허다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 정치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위기가 발생한 지 한 달 후인 1997년 12월 17일 대선이 실시됐다. 그전까지 우세했던 여당 후보의 지지율이 폭락했다. 일반 국민의 인식이 경제위기가 집권자들의 과오라 생각했던 것이다. 30여 년의 민주화 운동 중, 4회의 암살 시도를 극복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49년 만에 처음으로, 야당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것이야 말로, 대한민국 정치의 격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될 시기가 됐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의 당선은 1997년 경제 위기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IMF 경제 위기라는 의외의 여파가 대한민국의 짧은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온 것이다.

<사학 박사·전 조지타운대 교수>


오(조)봉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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