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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그해 여름은 뜨거웠네

가을입니다. 지난 여름은 뜨거웠습니다. 너무 뜨거워서 몸도 마음도 녹아 내렸습니다. 냉수를 벌컥 벌컥 들이켜도 속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지배에 의해 세계의 평화질서가 유지된다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도 미국우선주의에 기초를 둔 신(新) 세계질서인 ‘네오 팍스 아메리카나(Neo Pax Americana)로 빛을 잃었습니다.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미 행정부의 독선과 패권주의를 지켜보며 로마제국을 떠올립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판의 부당한 비방과 꼼수작전, 안하무인과 거짓선동, 자가당착과 표리부동에 빠진 정치꾼들의 사특한 행태를 지켜보며 분노하기에도 지쳤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판국입니다. 무너진 안보와 외교도 문제지만 당장 목을 죄는 생계 걱정과 특권층의 부정입학사례를 지켜보는 민중은 분통을 터트립니다. 이 모든 불이익이 없는 자 못 가진 자 빽 없고 힘없는 민초에게 주어진 형벌이라 생각하며 힘들었던 어깨를 가누지 못하고 참담해합니다.

제게도 어려운 일들이 겹쳤습니다. 봄부터 여름에 걸쳐 30년 넘게 펼쳤던 화랑 소매업을 접고 화랑 두 건물을 처분 했습니다. 동시에 이년에 걸쳐 기획했던 미술작품 출판회사를 설립하고 온라인 판매와 도매업을 시작했습니다. 1만3천 스퀘어 피트가 넘는 건물에 전시된 작품을 판매하고 옮기고, 건물 수리하고 이사 하는 일은 뼈를 깎는 중노동이 필요했습니다. 자고 눈 뜨면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정신이 오락가락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 되돌아 가고 싶었습니다. 터널은 되돌아 올 수 없습니다. 일단 그 속에 들어가면 어둔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죽자 사자 앞만 보고 달려야 합니다.

엎친 데 덮치는 게 인생살이라고 했던가요. 올 여름은 불에 데인 것처럼 사는 것도 쓰라리고 고달팠습니다. 인생의 귀로에 선 중요한 시점에 우서방이 아팠습니다. 병원 들락날락 하는 동안 한여름 뙤약볕에 누렇게 말라 비틀어져도 목숨 부지 하는 잔디처럼 살기 위해 모질게 목숨줄 잡고 있었어요. 끝없이 타오르는 용광로 앞에서 불씨가 옷깃에 닿을까 가슴 조리며 불길 잦아지길 기도했어요. 죽을 만큼 힘들다는 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우서방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어느새 가을이 창가에 서성입니다. 아침 저녁 찬 공기가 발길에 닿습니다. 모질게 힘들었던 여름을 떠나보내기 위해 노란색 국화꽃 앞뜰에 심고 양말 두켤레를 샀습니다. 무너지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선 따뜻하게 맞을 가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가을이 슬픈 건 삭풍 부는 겨울이 마지막이란 생각 때문이지요. 겨울은 계절의 끝이 아니라 생명을 품은 계절입니다. 가을 동안 풍성하게 익은 열매 가슴 깊이 간직하고 봄에 싹 틔울 준비하는 소망의 계절입니다.

오늘이 힘들다고 어제로 돌아 갈 수 없고 내일이 두려워서 계절을 건너 뛸 수 없습니다. 시작도 멈춤도 없는 계절처럼 밑도 끝도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무릉도원인지 신천지인지 하늘 끝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통과 아픔의 강을 건너면 새롭게 태어납니다. 소생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희망을 꽃 피웁니다.

그대여, 이 가을엔 슬퍼하지 마세요. 쓸쓸해하지도 말아요. 당신의 가을을 위해 빛 바랜 추억의 공책 뒷장에 ‘그해 여름은 뜨거웠네’라고 적어 두겠습니다. 넉넉한 등나무에 기대 ‘사랑한다’ 고백 담긴 엽서 바람결에 하늘 높이 날려주세요. (윈드화랑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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