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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기고] 서울 시장에서

청순하며 고운 열아홉 살 때 서울 가는 김에 어머니께서 언니에게 갖다 주라고 하신 찹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한양 가는 선비처럼 짐 보따리를 가지고 정든 흙냄새에서 멀어져갔다. 대구행 완행버스를 탄 후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상경할 때 어찌나 좋던지 잘 닦여진 창문 화폭에 약간 주름진 형부, 언니의 인물화를 눈으로 그려보며 감사한 마음이 창공에 닿을 듯했다. 비포장 도로였던 시골은 잠시만 걸어도 운동화에 먼지가 뿌옇게 폭폭 덮혔다.

서울 시내 아스팔트에 발을 딛고 수많은 차의 경적소리를 들으며 형부 댁에 도착 할 때까지 운동화가 원래 하얀 색 그대로 깨끗했다. 대한민국 수도에서 살게 됐다고 임금을 만난 기분으로 비둘기의 은빛 날개 속에 안긴 채 공중을 나르듯 마음은 들떠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 합격하면 학비를 감당해 주시겠다고 형부께서 말씀을 하시길래 한더위의 열풍도 동지섣달의 설풍도 달게 쐬며 노력했다.

겨우내 앙상했던 버드나무가 동한의 매서운 풍운을 들녘으로 보내 잠재우고 푸른 싹이 돋아 살랑대며 대지와 벗 삼는 것도 보고, 논두렁에서 뜯어 끓인 쑥국도 먹어야 되고, 산기슭에서 솔잎 가지에 붙어 봄맞이 한다고 뒷산을 쩡쩡 울리는 새벽 뻐꾸기 노랫소리도 들어야 되고, 두레박으로 풍덩 퍼 올린 샘물도 먹어야 되고, 동네 숲에서 화사하게 만발하여 평안을 열어 향기를 집집마다 선물로 주는 벨벳처럼 촉감 좋은 벚꽃 잎을 입술에 맞대며 눈을 지그시 감아봐야 되는데 발길을 옮겨야 했다.

그 해 봄은 무슨 초음파로 줄을 이었던지 어느 새 흘러버린 세월 속에 삼월 초순 입학 할 때가 되었다. 이제 집을 떠나면 영영 고향을 떠나게 된다고 숙모님께서 말씀하실 때 굵은 이슬이 텀벙 맺혀 볼을 적셨다. 몇 년 타향에서 살다보니 정말 그렇게 되었다. 개학을 앞두고 언니는 빈방 하나를 준비해서 공부만 하라고 내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다. 열심히 했으므로 좋은 성적을 받아 교수님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촌티나지 않으려고 눈치보고 있는 중에 친절히 대해주는 상냥한 서울 억양의 친구가 있어 참 기쁘고 좋았다.



어느 날 동대문 시장에 가서 특별히 맛있는 것을 내게 사주고 싶다는 게 아닌가! 시장으로 오면서 고맙다는 생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생전 안 보던 게 눈길을 끌어 물어봤다. “영숙아! 저거 봐라! 김이 술술 피어오르는 거 저게 뭐꼬? 김밥이가?” “뭐? 저거? 순대 아냐 순대! 순대 몰라? 얼마나 맛있다구. 내가 사줄게. 한 번도 안 먹어봤니?” “저런 거는 안 묵어봤지.” 낡아서 닳아 비뚤어진 좁고 긴 나무 의자에 어설프게 앉아서 먹었다. 친구가 그토록 빠른 속도로 맛있게 먹는데 뭔가 물어보고 싶어도 방해될까 봐 도저히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찐득한 냄새 물씬 풍기는 것으로 무슨 재료가 들었는지 궁금했다.

닷새 만에 여는 5일장에 어머니 따라 가 봤지만 이런 음식은 없었다. 다라이에 담겨 아직 안 썰어진 거무스레한 것으로 수증기가 온천수처럼 하늘거리다가 사라졌다. 교수들의 강의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며 바짝 굶었던 친구가 허기 채운 배를 슥슥 쓰다듬었다. 밀실에 잠겼던 의문의 답이 그녀의 촉촉한 입에서 풀어져 나왔다. 돼지 창자 안에 무엇을 넣어서 요리한 것이란다. “어머나!” 내장으로 만들었다니 깜짝 놀랐다. 그래도 서울 사람들이 잘 먹는 음식이라서 더 이상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젊은 아줌마는 뜨거운 순대를 썰어 올리느라 일과에 맡겨진 굵은 손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순대 부스러기가 갯벌을 디딘 어부들의 발자취처럼 어수선하게 보였고 그녀는 대학생들의 책과 노트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낯설고 특이한 맛이 입안을 채웠지만 Green 빛깔과 언약이 된 탓인지 자연히 안 먹게 되었다. 밭의 풀내음이 톡 터지는 천연자연 맛이 혀를 사르르 자극해주는 그게 더 나은 것 같았다. 그 후 갖가지 예쁘게 진열된 맛있는 떡을 내가 샀는데 한층 더 이색적인 맛을 느끼며 찬란히 빛나는 은하수 같이 맑고 짙은 우정은 여물어갔다. 타향의 황금빛 햇살은 저녁노을의 반려자가 되어 밀어를 나누면서 공작새의 깃털처럼 아름답고 잊을 수 없는 아스라한 천천만만의 추억을 장터에 담아주고 있었다. (수필가)


남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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