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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시작노트와 에스키스

이른 아침, 이슬에 젖은 잔디 위를 걷는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그 촉감을 느껴본다. 발밑에 닫는 촉촉히 젖은 잔디의 느낌은 머리를 맑게 한다. 잔잔히 퍼지는 가을의 초입 어디엔가로 날 데리고 간다. 어릴 적 물잠자리를 잡기 위해 무성한 숲을 헤치고, 실개천을 따라 산기슭을 올랐던 유년의 기억, 정신이 한곳에 집중되었던 때처럼, 파란 잔디 위에서 이슬의 미끄러움과 잔디의 폭신함에 흠뻑 빠져든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때나, 특별한 상황에 접하게 될 때 사람의 마음은 그 상황에 반응하게 된다. 화가는 그 풍경을 머리에 그릴 것이고, 시인은 시어를 찿아내 문장 몇 개를 마음에 남길 것이다. 작곡가는 콧노래로 벌써 몇 마디의 음율을 만들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화가나 시인이나 작곡가가 아닐 지라도 누군가에겐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겨져 기억의 창고에 오랜 시간 간직될 것이다. 그 추억은 나를 되살아 나게 하는 촉매가 되기도 하고, 그 기억으로 인해 깊은 후회와 슬픔 속에 빠져들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기 전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문장들을 시작 노트로 남겨 놓는다. 이 시작 노트는 시어를 끄집어내 시를 만드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때로 시작노트 자체가 하나의 시로 남겨지기도 한다. 화가의 에스키스도 마찬가지다. 구도와 명암, 형태와 질감을 스케치해 놓으면 실제 그림을 완성하는데 길잡이가 된다. 그 때 그 순간 떠오르는 악상을 메모해 놓으면 작곡의 테마 멜로디가 될 수 있고 그 곡의 느낌을 끌고갈 수 있는 좋은 모티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창작과정에서 간과 해서는 안되는 위험한 요소들이 있다. 그건 다 가지려고 하는 욕심, 단것은 삼키고 쓴 것은 뺃어내는 이기심이요, 둥글게 편히 살아가겠다는 자기 합리화이다. 우리는 그런 유혹에서 멀어져야 한다. 그 유혹은 사물을 직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있는 그대로의 핵심을 흐리게 한다. 사물의 본질로 들어가는 사유의 세계에 걸림돌이 된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은 중요하다. 기웃거리기 시작하면 본질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쓸 데 없는 선들을 자제하지 않으면 그 선들로 인해 핵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처음 시작의 초점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집중하기 위해선, 창작의 세계 속에서 자유롭기 위해선 내 몸이 무거워지면 안 된다. 가능한 힘을 빼고 가벼워져야 한다. 쓸 데 없는 것으로 채워진 모든 것에서 가벼워져야 한다. 무거운 몸은 스스로에게 덫이 되기 때문이다.



손주 벤자민(5세)이 키운다는 식물을 보고 놀랬다. 작은 곤충을 잡기 위해 덫을 놓는다고 했다. 이 식물은 향기로 곤충을 유혹한다고 한다. 펼쳐진 잎 속으로 곤충이 들어오면 잎을 오므리고 결국 곤충은 식물의 밥이 되고 만다. 작은 곤충들의 무모한 죽음을 보며 우리 인생도 다를 바 없겠다 생각이 들었다. 욕심과 이기심과 자기합리화의 유혹의 향기에 이끌려 우리도 때로 펼쳐진 잎 속으로 들어가는 무모한 인생들이 아니던가. 사탕발림과 감언이설에 넋을 놓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욕심과 이기심의 유혹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가 아니던가.

시인이 시작노트를 메모하듯이, 화가가 에스키스를 그리며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듯이, 작곡가가 악상을 떠올리며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꿈꾸듯이,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를 소중히 사유하며 살다보면 다가오고 스쳐가는 많은 풍경들, 일상의 평범한 상황들이 내게 특별한 의미로 손짓하며 말을 건네는 즐거운 시간들이 줄지어 다가올 것이다.
이른 아침 맨발로 잔디 위를 걸으며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둘 떠올리는 시간, 홀로 행복에 서서 오고 있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시카고 문인회장]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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