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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소리로 듣는 저녁

지금 나는 두툼하고 큰 검은 안경을 쓰고 있다. 이 안경은 가능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눈 옆을 가리는 덮개까지 있다. 백내장 수술 후 이 검은 안경을 꼭 써야 한다는 닥터의 간곡한 명령(?)이 있었다. 좀 갑갑한 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신비한 다른 세계로의 관문인 듯한 생각이 들어 거부감은 없었다. 병원문을 나오면서 난 줄 곳 이 신기한 안경을 쓰고 있다.

아내가 운전하는 옆자리에 앉아 눈부신 가을날, 눈을 감고 호사를 누리고 있다. 다리를 쭉 편다. 음악 소리가 좋다. 검은 안경까지 쓰고 있으니,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해가 떨어진 어둑한 저녁같이 느껴지는 건 무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내 귀는 절절한 노래와 가사를 쏘옥 쏘옥 전달해 주니 참으로 대견한 일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 당신의 쉴 곳 없네 /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 당신의 편할 곳 없네 /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가시나무란 간절한 노래가 저음의 자동차 엔진소리와 어울려 귓가에 맴돈다. 꼭 내 마음을 들켜버린 듯, 푹 빠져 가사를 음미하고 있다.

얼마를 달렸을까? 차고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걸 보니 집에 도착했나 보다. 눈이 좀 불편하고 피곤해 소파에 누웠다. 이내 눈을 감는다.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는지 키친 쪽으로 가는 소리가 들린다. 물소리가 난다. 냉장고를 열고 무언가를 꺼내어 사각사각 자른다. 썰뚝썰뚝 썰고, 기름에 무얼 볶는지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가 난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누웠고, 아내는 부엌에서 분주하다. 데크로 나가는 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난다. 시원한 바람이 실내의 무거운 공기를 밀어내듯 귓전을 스치며 들어온다. 풀벌레 소리도 함께 들어온다.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도 들린다. 눈은 감았지만 내 귀는 예민해져, 스쳐 지나는 소리 하나 하나 놓치지 않는다. 신기하게 그토록 울어대던 항 여름 매미소리는 사라지고, 귀뜰귀뜰 귀뚜라미 소리가 가을이다. 뒷뜰은 저녁이 채워지는 소리들로 즐겁고 생기 있게 깊어가고 있다.



"나 올라가요, 밥 다됐다는 소리 들리면 알려줘요." 아내의 발자국 소리가 내 옆을 지나 이층 계단을 오르더니, 점점 작아져 이내 조용해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가 덩그만한 이 집에 불현듯 찿아왔다. 얼마나 흘렀을까?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살아나고, 내 숨소리가 내 귀에 가깝게 들려 온다. 밥통에선 치익~ 소리가 들리고 이내 밥이 다 됐다는 알람이 울린다. 천리를 듣는 귀를 가졌는지 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식당에선 다시 후라이팬에서 달걀이 타닥 타닥 익어가고, 마이크로 웨이브에서 무엇인가 데펴지는 소리가 들린다. "괜찮아요? 식사 하세요." 아내의 반가운 소리에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벌떡 일어난다.

귀로 듣는 저녁은 왠지 조율되지 않은 건반을 조율한 후 들리는 맑은 소리 같다. 귀담아 듣지 않았던 소리들이 신기하리만큼 가까이 들리고, 아주 세미한 소리까지 내 귀에 인식되어져 읽혀지고 있다. 별 신경 쓰지 않고 지내왔던 나의 청각은 이 새로운 소리들로 깨어나고 있다. "나만이 아니겠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겠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깜깜한 밤처럼 눈뜨지 말아야지. 그럼 별들이 보이지 않을텐데 어쩌지.... 별이 지구로 보내오는 수십 광년전 태고의 소리가 들려 올레나?"
귀로 듣는 저녁은 무심하게 여겼던 소소한 소리들, 어딘가에 숨어있던 소리들이 살아나는 시간이다. 들리지 않았던, 아니 소음에 묻혀 들을 수 없었던 소리들이 가슴에 담겨져 새삼 살아있음이 감사해지는 시간이다. 오늘처럼 눈을 감으면 더 멀리 보이고 더 가까이 들리는 저녁이 온다. [시카고 문인회장]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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