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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미주 한인교회의 역사(5)

김목사는 토론을 중단시키고 잠간동안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함께 했다.
그리하여 잠간 냉각기를 가져 각자가 성찰할수있는 기회를 가진 후 속회를 했다. 그래도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아무리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안건도 그 회기에 처리하지 않고 연기했다.

김목사의 회의운용 방법은 교인총회에서도 반영됐다. 한 안건을 두고 몇몇 교인들이 10여분이 넘게 계속 발언을 함으로서 회의진행에 지장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자인 김목사는 발언을 허락했다. 지루하고 긴 회의지만 공감대 형성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다.

벧엘교회 규약은 장로교 전통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제직회 임무조항을 규명하고 있다. 즉 규약 제7조 제직회 임무조항에서 제직회의 예산 및 결산의 심의 결의권과 총회선출 장로후보 배수추천 권한이다. 이 조항은 1988년 초에 구성된 규약개정위원회에서 많은 시간을 토론한 끝에 결정한 조항이다. 규약위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장로교 전통에 의해서 이 2조항은 당회권한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규약개정위 원회 회장을 맡고있던 김상복목사는 제직회와 당회의 공감대를 위해서 장로교 전통에 상관없이 삽입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1988년 11월 총회에서 개정 헌법과 규약이 심의됐을 때 김목사는 이 2조항을 위해서 사람중심 리더십 스타일을 또다시 발휘했다. 그 후부터 이 제직회의 권한은 벧엘문화의 일부가 되어 이어오고 있다. 또 다른 예는 건축위원회 운영에서 찾아 볼 수있다. 새로운 교회건축부지를 매입한 교회는 1983년 5월 2일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곧 이어 시공사와 설계회사를 정하는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건축위원회 기능이 마비상태에 들어간 어려움이 생겼다. 김목사는 1985년 5월 건축위원회 기능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기로 한 당회결정을 발표, 교회는 전체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기간을 가졌다. 많은 교인들이 새벽에 교회 부지 옥수수받에 옹기종기 뫃여 합심으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으로 건축위 기능마비 5개월만인 1985년 10월 교인총회에서 9명으로 확대조직돤 새로운 건축위와 증가된 건축비를 인준했다. 건축위 기능이 5개월 중단됐지만 결과적으로 건축위 개편과 건축예산증가인준으로 교인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건축과정을 순탄하게 진행할수가 있었다.

1981년 12월 6일 30대 초반 손인식 목사가 부목사로 취임했다. 손목사는 취임하자마자 밤 늦게까지 심방을 강행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담임목사의 목회성공과 교회의 영적발전은 담임목사 독주로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김목사는 손목사와의 관계에서 사람중심의 리더십 스타일을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목사가 취임 3년 반 만인 1985년 7월 26일 갑자기 사표를 내고 교회를 훌쩍 떠났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한 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은 것이다. 다음 해 겨울 나를 포함한 5명의 ‘오늘의 양식’ 편집팀이 그랜드 레핏에 있는 ‘오늘의 양식’ 본사 라디오 바이블 클래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디트로이트에 들려 손목사를 만났다. 이 교회로 부임한지 1년 반 만이다. 우리는 손목사가 다시 벧엘로 귀환할 것을 권유했다. 1987년 3월 8일 손인식목사의 복귀를 인준하는 총회가 열렸다.

김목사는 이 총회에서 손목사와 다시 동역을 하고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래서 손목사는 벧엘을 떠난지 2년이 안되서 귀환했다. 내 기억으로는 교회를 떠난 부교역자를 담임목사가 다시 부른 예를 알지 못한다. 김목사는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중심 리더십 스타일을 발휘한 것이다. 그 후 두 목사는 다 벧엘을 떠났다. 그러나 이 두 목사의 관계는 지금도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다.

1980년 초 40대 초반 김상복 목사가 벧엘교회 초대목사로 취임 한 뒤 교인 수는 매달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대부분이 연합교회에서 온 교인들이었다. 친교중심의 연합교회 문화는 성경공부중심의 벧엘교회 문화로 전환점을 마지하게 되었다. 이민생활초창기의 친교중심의 연합교회 문화는 미국 땅에서 마지하는 외로움과 불안이 얽힌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당시의 시대적인 요구였을지도 모른다.

이민생활 안정기를 마지하여 성경공부중심의 문화는 또한 당시 교인들이 갈급하게 바랬던 시대적인 요청이기도 했다고 볼 수있다. 그 요청을 김상복 목사는 잘 직감했으며 이를 잘 부응해 나갔다. 김상복 목사는 연합교회 문화에 젖어있던 벧엘교인들에게 두가지 점에서 큰 자극을 선물했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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