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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 고전에서 ‘현재’를 읽다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11/05 16:24

어느새 두 장 남은 달력.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늘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벌써 11월이네. 벌써 한 해가 다 갔고, 나는 또 나이를 먹네.” 꼬박꼬박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이제는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것쯤이야 익숙할 법도 한데 아직도 시간의 흐름이 어색하기만 하다. 매 순간 나이 들어가지만 그 사실을 잊고 살다 연말이 돼서야 한탄하는 이유는 뭘까?

나쓰메 소세키 작가의 소설 ‘마음’(사진)에 등장하는 ‘선생님’은 책에 흥미를 잃어버린 이유를 늙어감에서 찾는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그만큼 훌륭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 나선다거나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모르면 수치인 것 같아 거북했는데, 요즘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선생님은 늙어가면서 스스로 타협하는 법을 익혔다.

‘나’는 휴양지에서 우연히 ‘선생님’과 만난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아닌데 부를만한 호칭이 마땅치 않아 선생님이라 부른다. 선생님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지만 직업이 없다. 아예 무슨 일이라도 할 생각조차 없다. 그렇다고 책을 열심히 읽거나 글을 쓰지도 않는다. 주체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의욕도 없고, 비뚤어진 세상에 대해 날 선 비판도 않으면서 인간에 대한 혐오감만 드러내는 선생님. 나는 언제나 선생님 머릿속이 궁금했다. 슬그머니 왜 이렇게 사는지 여쭙지만 돌아오는 답은 애매했다. 그러다 나는 선생님이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거기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과거가 적혀있었다.

선생님이 고향을 떠나 도쿄 하숙집에 머물 때 예쁜 하숙집 딸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친구 K가 하숙집 딸을 사랑한다고 속내를 털어놓을 때 자신이 먼저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못한 채 선생님은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한다. 하숙집 딸을 뺏기고 싶지 않아 친구 K의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려 배신을 맛보게 한다. 그 결과 친구 K는 세상을 등지고 만다. 결국 하숙집 딸과 결혼하지만 이후 지독한 자기비하에 빠진다. 아내에게 사정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한 달에 한 번 죽은 친구의 무덤을 다녀올 뿐이다.

선생님은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친구도 없는 고독한 사람이다. 거짓말로 친구를 죽음에 몰아넣고 여자를 가로챘다는 죄책감 때문이라 하기에는 평생 지고 온 대가가 너무 크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을 되짚어보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시고 어린 조카를 대신해 재산을 관리하던 숙부가 재산을 탕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선생님은 본능적으로 "아무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선생님은 지독한 자기방어적 삶을 살게 된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인정하는 일은 대단히 힘들다. 사람은 보통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왜곡해 바라보며 자기부정을 반복한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싶어 한다. 내 약점이 누군가에게 들킬까 걱정해 평생 가면을 쓴 채 살기도 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 선생님은 오히려 용기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겉으로는 세상을 등진 패배자로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강하고 적극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 숙부에게 속은 사건,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을 겪으면서 선생님은 타고난 악인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평소에는 모두 다 좋은 사람들, 최소한 보통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차하면 악인으로 바뀐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에서 깨달았다. 이후 무기력한 삶을 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게 선생님식 자기반성이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10년대, 메이지(明治)라는 한 시대가 저물어가던 시절이다. 급속한 근대화 물결 한복판에서 아직 순수하기에 인간에 대해 믿음이 남아 있는 대학생 ‘나’와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선생님’의 모습은 당대 일본의 지식인들과 닮아있다. 특히 자신의 행동을 윤리에 반한다고 여기고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동은 ‘윤리’를 추구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는 ‘메이지 정신’의 한 모습으로 귀결된다.

나쓰메 소세키 작가는 메이지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지만 백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와도 닿아 있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의 배신 이후 아무도 믿지 못하는 ‘신뢰’에 대한 거부감, 친구의 여자를 가로채고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의 이기심, 죽기 전에 단 한 명이라도 믿고 속마음을 터놓고 싶었던 ‘관계’에 대한 욕구는 수많은 사람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소설 속 선생님의 처절한 자기 고백이 유난히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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