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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불교를 정확히 분류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지난(至難)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불교는 근본불교 혹은 상좌부불교(Theravada), 대승불교(Mahayana), 금강승불교 혹은 밀교(Vajrayana)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소승불교(Hinayana)와 대승불교로 나누어 왔지만, ‘작은 수레’란 의미의 소승(小乘)은 대승불교 측에서 폄하해 부르는 표현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상좌부불교가 분리 발전되어 왔다. 각각의 불교는 다른 면에 포커스를 두기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문화적 모습과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개인의 수행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소승과 중생의 구제를 강조하는 대승, 어느 쪽이 부처님 본의에 더 가까운 가르침이고 어느 쪽이 현대 사회에 더 의미가 있을까? 한국은 대승불교가 주류이고 필자가 속한 교단 역시 대승불교에 가까워서인지 모르겠으나, 대체로는 대승을 선호하는 분위기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진의는 시간적 순차성뿐만 아니라 상호연관성에도 있어 보인다. 제국주의에 예에서 보듯이 평천하를 도외시한 치국도 인류의 행복을 저해하지만, 수신이 없는 제가 역시 생각할 수 없다.

소승과 대승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과 이웃의 행복을 도외시한 혼자만의 행복을 진정한 행복이라 말하기도 어렵지만, 내 코가 석자인 상태에서 이웃에게 진리와 행복을 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깨달으면 중생을 제도하지 않을 수 없고, 중생 제도에 관심이 없다면 진정한 깨달음이라 할 수 없다.



대종사께서는 “측량하는 사람이 먼저 기준점을 잡는 것이 중요하듯이 우리의 공부와 중생제도에도 기준점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공부의 기점은 자신의 마음공부에 두고 제도의 기점은 자신의 제도에 두어야 한다” 하셨다. 자신을 다 제도한 후에야 남을 제도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공부든 제도사업이든 자신에서부터 출발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불교는 깨달음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이다. 개인의 해탈이나 광대무량한 낙원세계 건설 모두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수행과 해탈을 강조하는 소승이 불교의 본령이라는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개인의 철저한 수행에 기초한 깨달음과 해탈이 중생 제도의 기본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예비교무 시절, 필자에게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스승님의 칭찬도, 도반들이 외출에서 돌아올 때 사온 순대도 아니었다. 자신의 공부와 수행에 철저한 도반들이야 말로 외롭고 힘든 출가의 길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인의 수행에 철저한 도반들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아마도 ‘대중과 함께’를 강조하는 대승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는 대승의 가치가 개인의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소승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훼손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양은철 교무 / 원불교 LA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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