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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칼럼] 죄 많은 삭개오와 예수 (눅19:1-10)

지난 칼럼에서 키작은 삭개오에게 한없이 낮아지신 키작은 예수를 다루면서 “인간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성급함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죄많은 삭개오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

“사람이 아들이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삭개오를 만난 예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다. “찾아 구원하다”는 말씀 속에 “찾다”는 발견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어는 “발견한다(find)”와 “찾으려고 노력한다, 혹은 추구한다 (seek)”를 동일한 단어 “찾다”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리스어 원문에는 find가 아니라 seek에 가까운zeteo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구하다, 노력하다, 찾아다니다”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이다 (참조, 고전 10:24). 즉 예수께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삭개오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애타게 찾아다니면서 그를 구원한다는 의미이다. 이 두 단어의 차이는 적지 않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7장7절에서 “찾으라(seek, zeteo) 그리하면 찾아낼 것(find, heurisko)이요”라는 말씀은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구하라, 그러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죄 많은 삭개오가 구하고 노력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잃어버린 자를 얼마나 애타게 찾아다녔을까?.

삭개오의 노력을 결코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소문으로 들어오던 예수를 직접 만나겠다는 열정은 진리와 구원에 무관심한 자들에게서 발견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겠다는 약속은 자신의 그동안 삶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회심의 증거다. 그 회심의 배경에는 자신을 삶을 “돌아봄”과,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찾아다니는 예수를 “마주함”이 함께 한다.



빼앗은 소유를 네 배나 갚겠다는 것도 출애굽기에서 소를 도적질하면 5배, 양을 도적질하면 4배를 갚아야 한다는 율법과 차이가 없다(출22:1). 심지어 삭개오는 이런 일을 하겠다는 약속을 했을 뿐이다. 배반한 가롯유다(막14:43-45), 변심한 베드로(막14:66-72), 다 도망간 제자들(막14:50)에 대해서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막14:27-31) 미리 예언까지 할 정도로 예수께서는 인간의 약속이 얼마나 허망한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신 후에 선의 약속이 아니라 “선의 실행”을 엄청 강조하셨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10:28). 율법사에게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선한 행동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죄인 삭개오에게는 약속만으로도 구원을 선포하며 기뻐하시는 예수는 불공평한 편애를 가진 자는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롭지 못한 사랑인가?

인간의 참회, 약속, 심지어 선한 행동조차도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만들어 내지만 구원을 이루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선물이다. 인간은 예수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구원을 애타게 찾아다니다가 예수를 발견하고 그 예수를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구원의 시작과 끝은 모두 자신을 낮추어서 희생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넘어서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 풍요로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삭개오도, 율법사도, 우리도 “인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관계, 선하고 정의로운 예수의 일들을 기쁨으로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차재승 / 뉴브런스윅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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