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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포럼] 참전으로 강해진 한국의 자존심과 군사독재

베트남 전쟁 지상 강좌⑧·끝

나는 박정희의 베트남 전략을 세 개의 'S'로 정리한다. 'Sizable' 'Speedy' 'Severe'. 규모 있는 군대를 신속하게 보냈고, 이들은 상황을 위중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라 반응했다. 이 모두를 미국은 필요로 했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전략적 파트너십 요구 무시

박정희는 베트남에서 미국의 한국군 의존도를 꿰뚫고 있었다. 그는 원조와 외화벌이를 넘는 반대급부를 요구했다. 앞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사태, 즉, 유사시를 대비해 군사, 경제, 외교적 협력을 체계화 한 관계를 전략적 파트너십이라 한다. 박정희에게 한.미 관계는 이미 눈앞에 펼쳐진 화재였다. 따라서 전략이 아닌 작전의 문제였다. 공산권의 도전에 대한 한.미 대응력 강화는 추후 문제이고 당장 승리를 목표로 싸워야 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박정희는 두 개의 큰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동맹이면 동맹답게,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토의하고 정하는 연합 작전 지휘 체계가 필요했다. 동시에 참전국들 간의 외교, 정치적 협의체를 워싱턴에 두어 장기적 전략 지도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수시로 호찌민에게 "언제 어디서나" 만날 용의가 있다며 평화 공세를 멈추지 않는 존슨 정부가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에서 박정희는 소위 '태평양 선언(Pacific Charter)'을 공표하자고 했다. 아시아 태평양에서 공산 세력의 침략, 팽창주의에 맞서 미국과 한국이 끝까지 싸우겠다는 전략적 목표를 설정해 거기에 합당한 행동을 취해가자는 야심 찬 요구였다.

1969년 리처드 닉슨 정부 들어 시작된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 외교 정책의 재고는 결국 중국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와 베트남전쟁 종료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베트남에 5만 명 군대를 파병한 한국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1972년 2월 중국 베이징에서 회담한 마오쩌둥과 닉슨. [사진 The National Archives]

1969년 리처드 닉슨 정부 들어 시작된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 외교 정책의 재고는 결국 중국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와 베트남전쟁 종료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베트남에 5만 명 군대를 파병한 한국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1972년 2월 중국 베이징에서 회담한 마오쩌둥과 닉슨. [사진 The National Archives]

결과는 초라했다. 연합 지휘체계, 전략적 상설기구, 전쟁 목표의 명문화 그 어느 것도 수용하지 않았다. 하노이가 검토 대상으로도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대한민국은 정식 참전국이니만큼 북베트남과의 평화를 논하는 자리에 참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시쳇말로 주제를 파악하라는 백악관의 냉소를 불러왔다. 한국군은 시키는 대로 싸우기만 하면 된다는 메시지였다.

푸에블로호 사건의 충격

1969년 1월. 박정희는 미국과의 동맹 관계의 한계를 처절하게 느껴야 했다. 그 달 21일 31명의 무장간첩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했다. 최종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북한의 대담성과 특수부대의 작전능력은 한국 사회를 격앙케 했다. 이틀 뒤인 23일 북한은 동해 공해상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정보수집선 푸에불로호를 나포, 원산항으로 끌고 갔다.

백악관 안보보좌관들은 이 같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박정희의 대응책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눈에는 눈 (Eye for an eye)."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미국의 군사적 대응력이 공산세력으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힘이다. 미국의 미온적 태도는 한국의 방위력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논리적이었지만 베트남으로부터의 출구 찾기에 매달린 존슨에게 설득력은 없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추가 군사 지원을 받는 대신 지신의 강경 안보전략을 포기해야 했다. 푸에블로호 승조원 86명(1명은 나포 당시 사망)은 거의 1년을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 풀려났다. 미국이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는 불법 집단과 직접 대화를 하고, 북한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 결과였다(참고로, 북한은 원산에 있었던 푸에블로호를 평양 대동강변으로 옮겨와 대미 항전의 승전물로 활용하고 있다).

'코리아 패싱'에 '자주' 부상

존슨 정부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한 박정희의 반감과 항의를 엿보게 하는 문건이 있다. 1968년 2월 10일 백악관 최고 전략회의에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통탄한다. "미국처럼 강한 나라가 어떻게 한국과 같은 약소국에 마치 위성국가처럼 끌려 다니는 것을 피할 수 있나?(How does a great power like the US avoid becoming a satellite of a small allied power?)" 신임 국방장관 글라크 글리포드도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은 미국이 자신을 돕기 위해 한국에 주둔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쩐 일인지 한국은 자신이 미국을 돕고 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South Korea should know that we are over there to help them. Somehow, it seems to them that they are helping US)." 다시 말해 박정희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다음해인 1969년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요즘 유행어가 된 '코리언 패싱'은 가속화 된다. 일부 주한미군의 철수, 북베트남과의 평화 협상, 그리고 한국을 고립의 패닉으로 몰아넣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 정상화.

박정희와 한국에 결단의 순간이 왔다. 현실은 냉정했다. 연인원 32만을 투입하고, 5000의 생명을 잃은 베트남에서의 희생은 미국이 국익을 지키기 위해 취하는 전략적 선택의 방향 설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여기서 '자주'의 개념이 거의 유일한 국가 이데올로기로 부상한다. 자주 국방, 자립 경제, 자주적 통일이다.

유신체제 군사독재의 등장

박정희는 이 같은 자신의 구국적 비전을 떠받쳐 줄 정치체제가 필수적이라 했다. '유신체제'의 탄생이다. 미국의 전통, 가치, 사상에 모두 반하는 군사독재의 등장은 미국의 역사 속에 도도히 흐르는 도덕적 우월성을 자극한다. 유신 독재 7년 만에 박정희 시대는 미국과의 긴장 속에 최 측근에 의한 암살이란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글자 그대로 다사다난했고 복잡미묘했던 박정희 시대의 키워드는 자존심이다. 베트남 전쟁은 대한민국이 무엇을 할 수 있나 바로 보라는 국가적 자존심이 없었으면 뛰어들 수 없는 난제였고 수렁이었다. 여기서 정부의 진취성과 군대의 전투력을 인정받은 한국의 자존심은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 자존심에 합당한 수준으로 한미관계는 승화되지 못했다. 군사적 희생에 걸 맞는 정치적, 외교적 반대급부를 확보하지 못한 역사였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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