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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에세이] 거슈윈과 뇌종양

거슈윈의 아버지는 러시안 유태인으로 1890년대에 세인트피터즈버그를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같은 배경 출신인 로즈 브루스킨이란 여자와 결혼했고 1896년 첫 아들 아이라를 낳은 후 1898년에 조지 거슈윈을 얻었다. 아버지는 ‘마음 좋고 유머가 많은 철학자’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유태인 엄마의 특징대로 ‘신경질적이고 야심이 많으며 목적을 달성하려는’ 극성스러운 여자였다. 아버지는 여자구두 윗부분을 만드는 기술자였는데 가족에게 아늑한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 무려 28번이나 이사했다.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1898-1937)은 어려서 음악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한 번 들은 멜로디는 잊지 않았다. 1910년 부모는 형 아이라를 위해 피아노를 구입했다. 이 피아노에 손을 댄 조지는 쉬지 않고 전에 들은 멜로디를 연주했다. 자연히 피아노는 조지의 것이 되었고 아이라는 피아노 교습이란 질곡에서 벗어났다. 1913년 그는 정식 컨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교습을 받았으나 정작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재즈와 유행음악이었다.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한 악단의 피아니스트로 직업을 얻었다. 제롬 컨이나 어빙 벌린 같은 유명 작곡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자신도 극장 작곡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앨 존슨 쇼에서 ‘스와니’ 같은 그의 작품들이 연주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그는 다음 번 음악회에서는 재즈 콘체르토를 연주하고 싶어서 ‘랩소디 인 블루’작곡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이 작품은 1924년 피아노곡으로 발표되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하여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다음 해 자신이 오케스트라 곡으로 작곡한 'Piano Concerto in F'도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거슈윈은 재즈에 머무르지 않고 더 심각한 고전음악을 공부하고 싶어했다. 그가 라벨과 불란저 같은 저명한 작곡가에게 제자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슈윈과 같은 천재성에 자신들의 생각을 불어 넣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의 형 아이라는 천재적인 작사가였다. 형제는 죽이 잘 맞아 많은 곡들을 작사, 작곡했다. 1930년 형제는 할리우드로 이주하여 거기서 많은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1931년 ‘제2 랩소디’를 작곡했고 다음 해 아바나를 방문한 후 ‘쿠반 오버추어‘를 발표했다.



가장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던 1930년대 중반 그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당시 아주 저명했던 정신 분석가를 찾아가 일주일에 5일씩 2년간 분석 치료를 받았다. 그 기간 동안 유명한 오페라 ‘포기와 베스’를 완성시켰다. 1937년 그의 행동은 이상해졌다. 주행 중인 차에서 운전수를 밖으로 밀어버리고 초콜릿을 온몸에 바르고 나타났으며 고무가 타는 냄새가 심하다고 불평했다. 연주 도중 자기가 작곡한 곡을 잊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기행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마도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위라고 간주했다.

돌이켜보면 거슈윈의 우울증만 보고 이년간이나 분석 치료를 한 것은 아무리 당시에 유행을 받던 학문이라 해도 정신분석학의 크나큰 오명이 아닐 수 없다. 환자가 계속해서 고무 타는 냄새를 맡았다면 적어도 그것이 두뇌의 측두엽에서 시작되었든가 또는 두뇌 큰 부분에 종양이 있더라도 측두엽까지 퍼졌으리라고는 짐작할 수 있었겠다.

그해 6월 23일 거슈윈은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LA에 있는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뇌종양을 진단할 수 있던 유일한 검사인 척수 액 검사를 거부했다. 그 절차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히스테리인 듯’이란 진단명으로 퇴원했다.

한 달 후 그는 무의식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갔다. 외과의는 그의 두뇌 오른쪽 측두엽에서 약 한 아운스의 짙은 황색 액체로 채워진 포낭을 발견했다. 포낭과 함께 그 속에 있던 액체도 제거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미국 대통령은 군함 두 척을 체서피크 만에 급파했다. 그곳에서 요트를 타고휴가를 즐기던 당시 신경의학계의 제일인자며 존스 홉킨스 대학의 신경외과 과장을 할리우드로 보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한 발 늦었다. 뇌암으로 인해 뇌압이 크게 상승한 결과 심박, 호흡, 체온 그리고 의식을 관장하던 뇌간이 두개골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그 결과로 그는 사망했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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