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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수구초심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우수상 수상자
정신심리클리닉 원장
정평수/수필가

어릴 때 내가 살던 ‘섬동’이란 마을 어귀의 고샅길 언덕에는 동백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누이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동백나무는 초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유난히 붉고 많은 통꽃을 피워 동네 어귀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곤 하였다. 우리 고을에서 동백나무는 전통 혼례식을 할 때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 동백나무 가지를 항아리에 꽂아 전통혼례 식장에 놓아두었는데, 이는 사철 푸르고 탐진 꽃을 많이 피우며 열매를 맺기 때문에 가문과 자식의 번창을 바라는 의미로 쓰이는 거라 듣고 자랐다.

동백나무는 내 친구 금주네 논시밭 양지바른 언덕에 있었다. 겨울이면 또래 친구들과 언덕에서 연을 날리다 싫증이 나면 동백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새로 떨어진 꽃을 주워 동백 새처럼 핥기도 하고 나무에 올라타 즐겁게 놀기도 했다. 슬슬 배가 고파질 즈음 금주 어머니는 가끔 먹을 것을 나눠 주시곤 했는데 돌아보면 그 시절이 내 인생에 가장 순수했고 아무 걱정을 안 해도 되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땐 간간이 고향에 내려갔지만, 대학을 졸업 하고 한국을 떠난 이후로 고향은 그저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세월이 흐르니 친구들 이름을 기억하는 것조차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도 그리운 마음은 더 애틋하다. 그래서 몇 년 전 동백꽃 두 그루를 사무실 입구 양쪽에 심었다. 동백나무는 객지의 지친 삶을 잠시나마 마음을 위로해 주는 고향 친구가 되어 주었다. 혼자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추억을 더듬으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다. 그런데 물이 부족했는지 잔가지부터 말라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지난겨울 죽어 버렸다.

지난번 고향을 방문했을 때 금주네 집은 빈집으로 남아 있었다. 혼자 살던 금주 어머님은 마당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논시밭은 잡초들로 무성했다. 소싯적 부엉이가 울던 밤이면 집집마다 노곤한 몸을 뉘던 그 많은 동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헝클어진 빈집들만 남아있었다.



얼마 전 아버지는 금주네 집터와 논시밭을 사셨다. 잡초와 대나무가 살고 있던 집터까지 침범한지라 형제들이 모두 모여 포크레인으로 갈아엎을 예정이라고 했다. 금주네 집은 우리 집의 논시밭 뒤 언덕 위에 있었다. 그곳에는 앵두나무가 있어 배고플 때 좋은 요기가 되곤 하였다.

집터를 갈아엎던 날 막내 남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두 누나와 매형들은 함께 오셨는데 큰 형님과 형이 없으니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 하네요. 큰형님이 며칠 전 맹장 수술을 받느라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부모님께 알리지 못했는데. 나중에 소식을 들은 어머님은 많이 우셨네요”했다. 연로하신 탓인지 자식의 작은 일에도 슬퍼하시는 모습이 안쓰럽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어떤 풍파에도 당당히 맞서던 분이셨는데, 이제 세월 앞에 많이 약해지신 것 같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동생에게 그 동백나무를 물으니, “형님, 몇 년 전 서울 어느 부잣집 별장에 심는다고 사백에 사가브렀다요. 부자에게 껌값이지만 시골 사람에게 큰 돈이지라. 형님도 그 동백나무를 기억하네요.”했다.

사람만 세월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이제 고향 산천의 나무까지도 어쩔 수 없이 객지 생활을 해야 하나 보다. 몇십 년 살던 땅에서 뿌리가 뽑히는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서울까지 실려 가느라 얼마나 흔들리고 목말랐을까! 운송 중에 흔들리고 목마름에 얼마나 긴장을 했을까. 어느 서울 부잣집 정원에 자리 잡았지만, 낯선 타향에서 시간만 되면 정원사에 의해 가지가 잘리는 고통은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궁금했다. 세상도 인정도 많이 변했다. 동백나무는 언덕 위 양지가 얼마나 그리울까. 동백나무 객지 생활이 남의 나라에 뿌리내리고 사는 내 모습 같아 마음이 아렸다. 살면서 걱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스스로 위로해 보고 감사한 마음으로 채워 보지만, 원 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살다 보니 세월이 너무 빠름에 마음이 허전하다. 요즘 들어 고향이 많이 생각이 난다.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우수상 수상자
정신심리클리닉 원장
정평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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