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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은혜와 진리를 누리자

이대열 목사 (열방침례교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은혜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적인 선물이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무능력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만약 인간의 선행이 조금이라도 개입되어 얻을 수 있는 어떤 선물이라는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보상이다. 보상은 수고한 대가로 받는 것이기에 온전한 감사를 할 수 없다. 인간의 무능력이 절대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은 무엇인가? 죽음의 문제가 아닌가? 아무도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죽음 앞에서 절대적인 무능력을 경험하는 인간에게 죽음의 문제를 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은 은혜가 아니겠는가?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를 주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으니 이것이 은혜가 아닌가? 또한 인간은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해야 할 존재다. 진리가 인간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혜를 구하며 진리를 찾고자 한다. 진리를 찾고자 종교와 철학과 지혜를 찾는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를 찾아가는 절망적인 문제는 너도 나도 자기가 찾고 주장하고 경험한 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는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한다.“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이렇게 상대적인 것일까? 의문을 갖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리를 무엇이라고 규정하겠는가? 특별히 예수와 관련하여 여러분이 발견하고 찾고자 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이 진리는 생명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럴 듯 해 보여도 생명과 관계가 없다면 우리의 운명을 맡길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이 아닌가? 즉 예수에게서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에서 생명이 충만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그러므로 사도요한이 생각한 은혜는 무엇인가? 구원에 관하여 절대적인 무능력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예수의 가르침이 은혜가 아닌가? 또 진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사용하였겠는가? 구원과 관련된 진리다. 그런데 이 구원의 진리는 은폐되어 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은폐된 진리를 드러내셨다. 이것이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 즉 계시다.

은혜와 진리의 또 다른 측면은 인간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은혜를 강조하다 보면 진리를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 또 진리를 강조하다 보면 은혜에 인색한 경향이 있다. 은혜와 진리를 공정하고 균형 있게 충족시킬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은혜와 진리를 충족시킨다. 즉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족된다. 인간의 죄를 심판해야 하는 생명과 관련된 진리와 또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은혜가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가 아닌가?

충만이라는 단어 ‘플레로마’는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최고의 영적세계로 간주하였던 단어다. 그들은 예수가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즉 예수는 충만이라는 영적세계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충만함이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은혜 위에 은혜러라

one blessing after another, (NIV)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존재인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충만한 진리와 은혜를 받고 또 받는 존재다. 당시 요한의 복음서를 읽는 유대인 성도 중에는 모세의 율법에 사로잡혀 아직도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요한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지적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율법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죄를 지적하고 결국 율법의 저주를 받게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게 된다.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은혜가 충만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성도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성도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알려준다.

첫째, 담대함으로 살아간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생을 얻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더 두렵고 불가능한 숙제는 없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사람은 새롭게 주어진 삶을 다른 차원에서 살아간다. 성도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단숨에 해결 받은 존재다. 그 이야기는 죽음을 깨뜨리고 죽음 너머의 능력과 죽음 너머의 가치와 죽음 너머의 소망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어둠에 속한 것이고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이 상실된 죽음의 공포로 사람들을 위협한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하여 (1) 끊임없이 노동하라고 한다 성실하라고 한다. (2) 더 많이 소유하라고 한다 (3) 성공하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발버둥일 뿐이다. 그러나...성도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자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즉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는 세상속에서 비록 부족하고 힘들어도 죽음 너머의 가치와 소망으로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담대하게 살아간다.

둘째, 인간관계 속에서 은혜와 진리를 균형있게 적용한다. 은혜 없이 전달된 진리는 자기-의로움으로 이끈다. 은혜가 없는 진리는 사람들을 파괴시킨다. 진리 없는 은혜는 거짓을 양산하고 도덕적 타협을 만들어낸다. 균형이 필요하다. 진리가 빠진 은혜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므로 그러한 은혜는 그쳐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속에서 어떻게 이 은혜와 진리를 균형있게 흘려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즉 세상의 무관심과 냉정 대신에 은혜와 관용을 베풀고 그리고 세상의 상대주의와 속임수 대신에 진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대열 목사 (열방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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